일찌감치 경영권 승계 통해 실전 경험 축적

국내 패션산업은 1970년대 후반 ‘톰보이’, ‘데코’ 등 1세대 기성복 기업들이 설립되면서 산업 기반이 마련됐다. 이후 기업의 음력이 30~40년을 넘어서는 2000년대 이후 2세 승계를 본격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패션업계 2세 경영은 성공사례에 비해 실패사례가 더 많았다. 창업주가 제조업이나 재래시장 도매업으로 어렵게 창업하고, 성숙기에 진입하면서 시장환경이 녹록치 않은 탓에 기업을 매각하는 사례가 많았다. 2세들도 가업을 잇기보다는 유통업이나 레저 등 새로운 업종에 관심을 기울이는 탓에 성공적인 승계 모델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러나 최근 상황이 달라졌다. 창업주가 20~30년간 특정 브랜드에 투자를 반복하면서 탄탄한 기반이 만들어졌으며, ‘창조경제’의 대표 산업으로 부각되고 중국을 비롯한 해외시장에서도 한국 패션에 대한 위상이 크게 올라갔기 때문이다.
- 의사결정권 과감히 맡겨 실력 검증
특히 창업주들의 인식도 많이 달라졌다. 흔히 마지막까지 “모든 것을 내가 결정한다”는 식의 과거 생각에서 벗어나 20대 2세에 경영권을 과감히 넘겨주거나 해외 법인 총괄을 맡겨 실력을 검증하고 있다.
‘메트로시티’를 전개하는 엠티콜렉션(대표 양지해)은 창업주가 이미 10년 전에 당시 27세인 양 대표에게 경영권을 넘겨줬다. 양 대표는 지난 10년간 ‘메트로시티’ 외형을 1500억원으로 키웠으며, 특히 특유의 감성 경영으로 패션 명가를 이뤄내고 있다.
이 회사 윤재헌 부사장은 “세계적 패션명가들의 공통점 가운데 하나는 규모가 아니라는 것이다. 엠티콜렉션은 일찌감치 경영이 승계됐기 때문에 젊은 오너가 장기적 안목에서 사업을 설계할 수 있었다. 기획상품 안 만들고, 노세일로 일관하며 브랜드 가치를 유지하는 것도 젊은 오너의 장기적 로드맵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주장했다.
잠뱅이는 창업주의 갑작스런 유고로 2세가 일찌감치 경영일선에 뛰어들었다. 입사 초기 기업의 매각까지 고려할 정도로 어려웠지만, 배수의 진을 치고 노력한 결과 안재영 대표(어머니)의 뒷받침 위에 경영인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김명일 잠뱅이 전무는 최근에는 남성복 셀렉트숍 비즈니스인 디스클로즈와 온라인 유통사업을 새롭게 펼쳐 미래형 사업모델을 개발하고 있다.
-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통한 성장도 필요
슈페리어 김대환 부사장은 ‘페리엘리스’ 등 초기 사업에서 100억원 이상을 까먹는 시행착오도 겪었다. 그러나 값비싼 수업료를 낸 만큼 성장도 빨랐다. 대부분 소극적으로 임한 홈쇼핑 시장에 2010년 과감히 도전해 4년만에 500억원 규모로 외형을 키웠으며, 2011년에는 주변 반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블랙마틴싯봉’을 20억원에 인수했다. 새로 인수한 브랜드로 도전한 시장은 패션잡화. 독특한 마케팅과 가격 차별화 전략을 펼친 결과 ‘블랙마틴싯봉’은 2년차에 250억원의 루키로 성장시킬 수 있었다.
지난 1967년에 창업해 50년의 전통을 바라보는 슈페리어는 신규 사업에 대한 과감히 도전한 2세 경영인에 힘입어 향후 100년 기업으로 성장할 기반을 다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보끄레머천다이징(대표 이만중)도 남다른 2세 승계로 주목받고 있다. 이 회사는 소재기업인 금강화섬이 출자하고, 코오롱 출신의 이만중 회장이 경영을 맡아 1992년에 창업한 기업이다. 금강화섬의 장남인 민경준 과장은 5년 전 입사해 ‘라파레뜨’ 사업부에서 경험을 쌓고 있다. ‘라파레뜨’는 셀렉트숍으로서 300억원(41개점)의 외형으로 성장하며 가장 높은 수익률을 자랑하고 있다.
민경준 과장은 “‘라파레뜨’를 통해 한 매장에서도 연간 100억원의 매출을 올릴 수 있는 자신감을 갖게 됐다. 초기에는 콘텐츠 바잉에 고전했지만 이제는 다양한 형태로 진화시킬 수 있다”면서 뉴 비즈니스 모델에 대한 자신감을 나타냈다.
또 이 회사는 이만중 회장의 장남은 중국 법인에서 베이커리 사업을 통해 새로운 성장기반을 만들어 가고 있다. 창업 과정에서도 독특한 경영 형태를 선보였던 보끄레머천다이징은 2세 승계 과정에서도 패션 명가다운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 글로벌 감각으로 글로벌 기업으로 육성
구두시장의 리딩 컴퍼니인 탠디(대표 정기수)의 장남인 정인원 대표(34세)는 와세다대 정경학부를 졸업한후 3년 전부터 자회사 미쉘의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그는 오전에는 ‘탠디’ 사업부로 출근해 창업주인 정회장으로부터 경영 전반에 걸쳐 수업을 쌓고, 오후에는 미쉘로 출근해 책임 경영을 펼치고 있다. ‘미쉘’은 지난해 1300억원의 외형으로 성장한 볼륨 브랜드.
프리미엄 전략으로 일관하고 있는 탠디와 달리 좋은 상품을 대중적으로 판매함으로써 외형 확대는 물론 수익성을 높이고 있다.
‘루이까또즈’로 유명한 태진인터내셔날 전용준 회장의 장남은 올해 34세의 전상우 부장. 서강대 경제과를 졸업한 후 6년의 금융권 경험을 거쳐 2011년부터 회사에 들어와 경영 수업을 받고 있다. 최근에는 프랑스법인 대표로 일하면서 업무 효율을 극대화 하고 있다.
글로벌 감각을 갖춘 2세들의 활약으로 창업주들이 만든 ‘패션 명가’의 글로벌 버전도 기대할 수 있게 됐다.
정인기 기자
ingi@f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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