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몇 년 전 중국에서는 ‘디테일의 힘’이란 책이 크게 유행했다.
책이 유행한다고 해봐야, 실제 구매하는 것은 소수 지식인들 뿐이겠지만, 이 책이 유행한다는 현상 자체는 그 사회의 어떤 시대적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흔히 중국 사람들이 실속없이 허황된 소리를 잘한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 중국인들 중에는 한국 회사들을 방문해서 ‘그저 당신과 합작하고 싶다’, 내지는 ‘나는 이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다’라는 얘기만 한 두시간쯤 늘어놓는 사람들이 왕왕 있고, 이들 중 누군가와 사업을 추진해보려 하면, 막상 추상적인 얘기만 내놓을 뿐 구체적인 진행은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중국인들조차도 이런 문제를 너무 잘 알고 있던 찰나, 이 ‘디테일의 힘’이란 한권의 책이 등장했다. 이 책을 판매하고 구매한 모든 중국인들은 중국사회가 성장하려면, 바로 이같은 힘이 필요하다고 절실히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중국 친구들을 만나면, 이들은 한국인이 가진 디테일한 힘을 굉장히 존중하는 듯 보였다. 한국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성실하고 허황되지 않다는 생각, 일단 한국에서 프로라고 하면 상당히 해박한 지식과 노하우를 가졌을 거란 생각을 자연스레 품으면서 말이다.
그러나 최근 몇년간 국제 정세가 상당히 바뀌고, 오늘날의 세계 경제 성장률을 중국이 견인하게 된 요즘, 중국인들의 생각은 매우 달라지고 있음을 느낀다.
그들 또한 놀라운 성장을 거듭하면서, 이제는 시장이 원하는 것을 정확히 반영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걸 뼈저리게 느낀 탓일 것이다. 그들은 이제 자신의 고객들에게 온전히 집중하게 되었다.
오늘날 대부분의 중국 회사는 자신의 고객이 원하는 걸 가진 회사에 관심이 있을 뿐, 한국에서 왔다는 프리미엄 자체에는 다소 시들한 관심을 보인다. 이미 그들이 많이 디테일해진 결과다.
가끔 한국 회사와 중국 회사의 협상을 우연치않게 지켜볼 경우가 있다. 이 경우 늘 안타깝게 여기는 부분이 있다면, 한국 회사들이 조금 덜 디테일하고, 인내심있고, 가변적인 접근을 했으면 하는 부분들이다.
대부분의 한국 회사들은 정확한 목표와 전략을 가지고 공격적인 접근을 펼친다. 이것은 멋진 일이지만, 너무 가변적인 오늘날의 상황에서 보자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나 일어날지 아닐지도 모를 일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고 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전과 달리 시장을 주도할 수 없다. 이미 세상은 그렇게 바뀌어 버렸고, 특히 중국처럼 미지의 거대 시장을 공략하려 할 때에는 촘촘히 세웠던 수많은 전략과 목표들이 실전에서 무상해질 때가 많다.
이는 동해안의 바닷길을 잘 아는 선장이 아무리 계획을 잘 세운다 해도 갑자기 대서양을 항해할 수 없는 이치와 같다.
중국사업은 디테일한 목표보다는 커다란 지향점을 세우고, 추이를 보아가며 탄력적으로 운영해야 할 시점이다. 이런 탄력적인 운영이 가능하려면 몸집이 작아야 한다.
몸집이 커져버리고 나면 목표는 더이상 추구해야할 지향점이 아니라, 생존을 걸고 쫓아오는 빚이 되어 버린다. 상대와 더딘 대화의 시간을 통해 이야기를 끌어가며 함께 디테일을 구상할 때, 비로소 가장 빠른 사업의 길이 열리게 된다.
가끔 중국 회사를 소개해달라는 부탁을 받을 때가 있다. 그러나 어떤 부탁은 너무도 디테일해서 되려 소개하기 곤란한 경우들이 있다. 마치 어떤 남성이 자신이 원하는 여성상을 구체적으로 열거해서 신붓감을 찾는 경우와 같다고 할까. 어떤 여성들이 감히 그 남성을 만나보길 원하겠는가.
특히 신뢰를 중시하는 중국인의 성향에선 아직 신뢰가 쌓이지 않은 기업의 너무 디테일한 조건들이란 부담스럽기 마련이다.
가깝고도 먼 시장 중국. 중국 진출을 노리는 많은 한국 기업들에게 더디더라도 보다 현실적인 성과가 있기를 기대해본다.
김소희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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