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Y인터내셔널 이사 / 연세대 생활환경대학원 겸임교수 
“다른 사람처럼 보여야 하지만 정확하게 다른 사람들처럼 보여서는 안 된다….”
작년 한해 인문학계에서 가장 뜨거웠던 학자 중 한 사람인 강신주 씨의 주장이다. 이 말엔 유행의 성격과 본질이 함축적으로 녹아 들어있다. 독일의 사회학자 게오르그 짐멜은 유행을 모방과 개성, 또는 사회화와 개별화라는 두 경향 사이의 대립이며 어느 한 쪽이 결여되어도 유행은 성립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내가 속해 있거나 속하고자 하는 집단의 일원으로서 그들과 같아 보이고자 하는 마음은 소속감이라는 인간의 사회적 욕구가 반영된 것으로 모방과 사회화를 수반한다. 동시에 이러한 모방과 사회화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과 조금이라도 다르게 보이고자 하는 마음은 개성과 개별화(차별화)를 추구하게 한다.
유행은 이와 같은 과정을 지속적으로 반복하면서 존재한다. 짐멜의 주장은 모방(사회화)만 있고 개성(개별화, 차별화)의 추구 과정이 없거나, 그 반대로 차별화만 있고 모방이나 사회화의 과정이 없다면 유행현상은 존립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결국 유행은 누군가를 끊임없이 모방하고 그러면서도 그 누군가와 끊임없이 다르고자 하는 두 가지 상반된 욕망이 서로 대립하고 충돌하는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유행은 이러한 과정을 지속적으로 반복한다. 유행의 내용은 바뀌어도 그 형식, 즉 교체 형식 자체는 지속된다. 유행을 구성하는 내용은 순간적이고 덧없는 것이지만 부단한 변화를 원리로 하는 형식은 지속적으로 유지된다. 이것은 우리가 높은 언덕 위에서 강물을 바라보는 것과 비슷하다. 우리가 바라보는 강물의 표면은 늘 한결같고 변화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 표면 아래를 흐르는 강물은 언제나 다르다. 오늘 흐르는 물은 어제 흐른 물이 아니며, 내일 역시 오늘과는 다른 새로운 물이 흐르는 것과 같은 이치다.
유행의 또 다른 특성은 자기를 소멸시킴으로써 그 생명이 유지된다는 것이다. 현재 오늘을 관통하는 유행은 그 안에 이미 내일의 새로운 유행을 잉태하고 있다. 오늘의 유행을 세상에 내 놓은 사람들은 벌써 내일의 유행을 준비하기 위해 분주하다. 당연히 내일의 유행은 오늘의 유행과 달라야 한다. 이렇게 끊임없는 자기부정과 파괴를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유행의 존재형식이다.
한편 현대 소비자본주의사회에서 유행이 차지하는 역할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크다. 단순히 패션과 밀접한 트렌드나 시류 정도로만 이해해선 곤란하다. 지난 글에서도 언급했듯 현대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소비가 이루어져야만 원활히 작동하는 구조를 갖고 있다. 그래서 소비하고 또 소비하게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선 멀쩡한 것을 두고 또 새 것을 사게 해야 하는데, 이를 촉진시키는 것이 바로 유행이다. 현대사회에서 낡아서 버리는 것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버려지는 것의 대부분은 새롭게 등장한 유행과 맞지 않아서다. 이러한 맥락에서 유행은 현대소비를 움직이는 엔진과도 같다. 이렇게 유행은 낡은 것을 폐기하고 새로운 것을 소비하게 함으로써 소비를 습관화시킨다. 그리고 이미 포화상태에 도달해 있는 소비시장을 해체하고 그 자리에 새로운 소비를 만들어낸다.
유행은 현대인들의 ‘구별짓기’ 욕구를 충족시키는 수단으로서도 기능한다. 유행에 뒤쳐지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많은 돈을 지출해야 한다. 더구나 지금처럼 유행의 변화 속도가 빠른 상황에서는 더 많은 소비와 지출이 필요하다. 유행을 따르는데 소요되는 비용은 더욱 커지게 되고, 이 비용이 커질수록 유행은 ‘구별짓기’ 를 위한 강력한 도구로 기능한다. 결국 유행은 서로를 구분하고 구별짓고 더 나아가 암묵적 신분 및 서열체제를 구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따라서 신분상승의 욕구가 클수록, 주류로부터 소외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일수록 유행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가 유행을 외면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유행을 거부하기 어려운 또 다른 이유는 유행이 단순히 개인적 기호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새로운 무엇이 유행되기 시작하면 산업자본은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가 그 무엇의 생산에 몰려든다. 따라서 소비자로서 유행에 신경을 쓰지 않으려 해도 유행하는 스타일을 제외하면 시장에서 살 만한 것이 딱히 없는 상황이 된다. 이러한 이유로 유행은 산업자본이 정해놓은 소비규범으로 기능한다.
새해가 되면 언제나 올해의 트렌드를 예상하는 책들이 서점의 한 켠을 가득 메운다. 지금까지 논의한 내용들에 기초하여 2015년 등장할 트렌드들을 살펴보는 일은 소비와 유행을 이해하는 데 매우 유의미한 통찰을 제공할 것이다. 유행은 작년에 구입한 제품을 낡고 트렌드에 뒤쳐진 것으로 만든다. 그리고 그 자리를 최신의 새로운 제품으로 대체한다. 유행은 그렇게 끊임없는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거듭하면서 소비하고 또 소비하게 만든다. 이처럼 현대 소비자본주의 시대에서 유행은 소비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만약 햄릿이 현대를 살았다면 그의 희대의 명대사는 이렇게 바뀌었을지도 모르겠다.
“유행을 따를 것이냐 따르지 않을 것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윤태영 GY인터내셔널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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