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Y인터내셔널 이사 / 연세대 생활환경대학원 겸임교수

수 세기 동안 의복은 사람들의 신분과 그 지위를 상징하였다. 각 계층의 사람들은 다른 선택의 여지없이 신분에 따라 정해진 옷을 입어야만 했다.
그러나 18세기 이후 귀족들이 몰락하고 검약, 성실, 노동이라는 청교도적 가치로 무장한 부르주아가 등장함에 따라 의복 착용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의복의 변화 과정에서 아이러니는 계급적 성격이 강하고 사치산업을 상징했던 오뜨꾸띠르가 패션의 민주화에 기여한 부분이다. 찰스 프레드릭 워스의 오뜨꾸띠르 창시 이후 폴 푸아레는 여성의 허리를 옥죄던 코르셋을 제거함으로써 여성의 몸을 해방시키는데 기여한다.
그 뒤를 이어 가브리엘 샤넬은 복잡하고 화려한 장식을 배제하고 옷을 최대한 단순화시킴으로써 패션을 누구나 쉽게 접근하고 또 모방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었다.
샤넬의 옷을 기점으로 화려한 장식과 사치는 축소되고 단순하고 간소화된 오늘날의 의복 형태의 원형이 만들어진다.
패션의 민주화 과정을 촉진한 요소들은 또 있다. 바로 스포츠와 근대 예술, 그리고 대중 매체의 발달이다.
스포츠는 육체적 활동을 방해하지 않는 간결한 옷을 필요로 하였고(의복에서의 화려한 장식이나 레이스, 기타 장신구는 스포츠 활동에 방해가 되었다), 피카소·브라크 등이 중심이 된 큐비즘의 근대 예술 역시 회화, 조각, 건축뿐 아니라 패션과 디자인에도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또한 영화와 미디어 등 대중매체의 발전은 패션에 대한 대중의 취향과 욕구를 균질화 시키는데 기여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패션은 ‘민주적인 외양의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또한 현대 패션의 미적 기호들은 더 이상 특권층을 위해 폐쇄적으로 존재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 궁중 밖 광장으로 나와 수 많은 대중의 생활에 영향을 주고 또 받으며 함께 호흡하는 일상이 된 것이다.
패션의 민주화 과정은 현대 소비사회에 이르러 그 절정을 맞는다. 도시로의 인구 집중이 가속 화되고 사람들간의 커뮤니케이션이 내밀해질수록 사회는 더욱 균질화되고 민주화되게 된다.
모두가 비슷비슷해진 상황에서 개인들의 차이화에 대한 욕구는 더욱 커지게 되었고, 이러한 현대인들의 차이화 욕구를 여하히 충족시키며 패션의 민주화 과정을 가속시킨 것이 바로 패스트 패션이다. 잘 알다시피 패스트 패션 브랜드들은 매주, 매일이 멀다 할 정도로 새로운 디자인과 유행을 쏟아내며 현대인들의 차이화 욕망에 불을 지피고 있다.
◇ 패스트패션 성공 = 제3세계 노동자 착취
패션의 민주화 그 근저에는 누구나 쉽게 구입 가능한 낮은 가격이 전제되어 있다. 패스트 패션은 오뜨꾸띠르나 디자이너 브랜드에서 느낄 수 있는 감성을 낮은 가격에 제공함으로써, 그 동안 소수에 의해 독점되어온 고급스러운 패션 감성을 대중화시키는데 기여하였다.
현대 사회 에서 패션의 민주화는 패스트 패션에 의해 그 마침표가 찍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패션의 민주화를 완성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패스트 패션은 다른 새로운 문제를 야기 하였다. 이미 전 세계적으로 이슈가 되고 있는 것처럼 패스트 패션의 성공 이면에는 환경 파괴와 제3세계 노동자들에 대한 열악한 근무여건, 그리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저임금을 기반으로 하고 있음이 밝혀졌다(방글라데시의 여공들이 한달 내내 일해 받는 월급은 우리나라 돈으로 4만원이다).
지난해 방글라데시에서 수백 명의 목숨을 앗아간 봉제공장 건물 붕괴의 대형 참사는 패션 민주화에 대한 대가 치고는 너무도 가혹한 것이었다.
우리는 지금 패션 민주화의 덫에 걸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모습이다.
머리로는 패스트 패션의 어두운 이면에 대해 비판하고 문제를 제기하지만,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못 지나치듯 우리는 지금도 패스트 패션 브랜드의 매장 앞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패션 민주화의 과실은 달콤했지만, 그 과실은 인류의 미래를 담보로 한 것이었으며, 동시대를 살아가는 자의 무거운 도덕적 책임감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아직까지 우리는 패스트 패션이 패션의 민주화에 기여한 부분에 더 크게 주목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패스트 패션의 어두운 이면이 문제이긴 하나 패션 민주화에 기여한 공로를 더 생각해 주어야 한다고 말이다.
그러나 조만간(아니 이미 시작되었는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이 덫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와 우리의 후손이 감당해야 할 후과가 만만치 않을 것임은 너무도 자명하다.
현대 사회를 우리는 소비자본주의 시대라 부른다. 따라서 소비의 역할과 영향력이 그 어느 사회보다 크고 엄중하다는 것이다.
결국 소비의 주체로서 우리가 행하는 소비의 내용과 양태들이 이러한 문제 해결의 단초임을 새삼 강조할 수 밖에 없다. 기업이 가장 무서워하는 존재가 바로 소비자이기 때문이다.
윤태영 GY인터내셔널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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