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럽 럭셔리 브랜드들은 어떻게 헤리티지를 다져나갈 수 있었을까요? 그 유래를 찾아보면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이 보입니다.”
박은관 시몬느 회장은 지난 34년간 핸드백 산업에 몸을 담았다. 27년 전에는 핸드백 ODM 기업인 시몬느를 설립하고 ‘마이클 코어스’ ‘마크제이콥스’ ‘코치’ ‘DKNY’ 등의 세계적인 디자이너 브랜드의 핸드백의 디자인에서부터 생산에 이르기까지 공급을 도맡아 왔다. 특히 럭셔리 브랜드가 보다 대중적으로 인기를 끌 수 있도록 진화한 어포더블 럭셔리의 태동과 성장을 함께 해온 핸드백 역사의 산증인이다. 그에게 ‘브랜드 헤리티지’에 대해 화두를 던지자 유럽 럭셔리 브랜드의 태동부터 설명하기 시작했다.
◇ 유럽 럭셔리, 전략적 브랜딩으로 재창조
“사람들은 몇 백년 이상의 역사가 바탕이 되어야지만 헤리티지 브랜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지금의 헤리티지 브랜드들은 모두 전략적인 브랜딩을 통해 재창조된 것들입니다.”
요즘 소비자들은 ‘샤넬’ ‘루이비통’ ‘프라다’ 등의 브랜드를 몇 백년 이상의 전통을 지닌 브랜드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역사를 자세히 따져보면 100년도 채 되지 않는다.
불과 200~300년 전만 하더라도 핸드백은 개인이 만들어 포장 용기로 활용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던 것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여성들의 사회 참여가 늘어나자 수요가 급격하게 늘었다. 신변잡화를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한 운반도구로써 필요성이 증가한 것이다.
그러다 1960~1970년에 들어서면서 미국이나 유럽 여성들의 소득 수준이 증가하며 핸드백에 미적 감각, 패션성을 접목시키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산업 자본이 패션업계에 유입되기 시작했고, 브랜드들은 사회학자, 심리학자, 큐레이터들을 동원해 브랜드 족보를 재구성하고, 그간의 역사를 담은 책, 사진 등을 만들어 언론 홍보에 활용하며 100년 역사를 지닌 브랜드로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해냈다.
1970년대 경제대국으로 떠오른 일본 시장에 진출해 음악, 미술, 건축, 인테리어, 스파, 레스토랑 등 폭넓은 분야의 마케팅 활동을 통해 상품과 함께 문화를 판매하며 폭발적으로 성장했고, 꼼꼼한 일본인 소비자 입맛에 맞추며 품질에 대한 기존도 완벽히 정착됐다. 이렇게 핸드백 브랜드는 일본, 미국, 그리고 유럽, 한국, 중국 등의 시장으로 퍼지며 세계적인 브랜드로 자리매김했다는 것이다.
“‘루이비통’도 원래 왕족이나 귀족들이 마차를 타고 여행다닐 때 짐을 싣기 위한 트렁크를 제작하던 곳으로서 기차라는 운송수단이 등장한 후로는 거의 사라질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러다 1970년대 산업자본이 투입되며 회생됐으니 실제로는 그 역사가 50년 남짓 되는 셈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더스트리얼 헤리티지’이고, 우리 패션업계가 풀어낼 수 있는 힌트라고 생각합니다.”

◇ 시몬느만의 헤리티지 다져갈 것
박은관 회장은 요즘 30여년의 기업 성장을 바탕으로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 글로벌 럭셔리 브랜드의 역사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배운 그들의 헤리티지에 대한 노하우에 시몬느만의 경쟁력을 더해 ‘시몬느의 헤리티지’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세계적인 큐레이터 주디스 클락 또한 박 회장에게 “시몬느의 지난 역사를 살펴볼 때 시몬느만의 헤리티지가 분명 존재하며 이를 정리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최근 20~30년간 미국 어포더블 럭셔리가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시몬느가 무대 안팎에서 큰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라는 것.
실제로 시몬느는 디자이너 브랜드들이 핸드백 시장에 잘 진입할 수 있도록 콘셉부터 제작까지 전 과정에 참여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전 세계 럭셔리 핸드백 시장의 8%, 미국 시장의 25%(매출 7조원)를 생산하고 있다. 따라서 어포더블 럭셔리의 리더로써 그간의 헤리티지를 문화적 측면과 산업적 측면에서 체계적으로 정리해야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박 회장이 가로수길에 박물관을 만든 것은 ‘시몬느 헤리티지’를 위한 그 첫 번째 발걸음이었다. 2012년 가로수길에 문을 연 핸드백 박물관 ‘백스테이지’에는 16세기부터 현대까지 역사적 의미를 지닌 핸드백 350여 점을 한 자리에 모았다. 이와 함께 핸드백의 역사를 담은 책도 출간했다.
또 시몬느의 모든 노하우를 활용해 자체 브랜드 ‘0914’ 론칭을 준비하고 있다. 이를 위해 2년간 아홉 번의 전시회를 선보이는 장기 프로젝트를 선보이고 있는데, 아티스트들에게 ‘핸드백’이라는 모티브로 작품을 만들게 하고 이를 전시해 대중에게 소개하고 소통하는 자리를 마련하기 위함이다.
첫 번째 전시회에는 ‘여자의 가방’을 주제로 여성들이 핸드백이 사회 문화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고, 두 번째 ‘가방을 든 남자’ 에서는 이충걸 GQ편집장이 수집해온 가방들을 통해 가방이 품고 있는 단상을 시각화했다. 2년간 9회 열리는 이 전시회는 무려 40억원이 투입된 대규모 프로젝트다.
하지만 대규모 프로젝트임에도 이 전시회들에서 ‘0914’에 대한 그 어떤 직접적인 정보나 제품을 노출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박 회장은 이를 ‘얼굴을 보여주기 전에 마음을 먼저 보여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작가들이 핸드백의 의미와 본질을 어떻게 해석하고 표현하지는지를 보고 배우는 데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아티스트를 활용해 상품 디자인을 하거나, 상품과 연계시켜 프로모션하는 것은 이미 많이들 해왔고, 그게 본질 가치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보다는 우리의 핵심 가치를 찾고 헤리티지를 완성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봅니다.”

◇ ‘코리아 DNA’ 가진 글로벌 브랜드 만들 때
시몬느가 이처럼 헤리티지 다지기에 적지않은 시간과 자금을 투자하는 것은 이제 아시아, 특히 한국의 DNA를 지닌 브랜드를 만들 때가 됐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헤리티지 브랜드를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삼성을 봅시다. 스마트폰 후발주자였던 삼성이 ‘갤러시’라는 브랜드를 성공시켜 이제는 업계의 트렌드를 리드하는 선구자로 떠올랐습니다. 훗날 큐레이터가 전자산업의 역사를 정리한다면 그때는 분명 삼성을 업계에 한 획을 그은 헤리티지 브랜드라고 말할 겁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패션산업에서도 그러한 존재를 가진 브랜드가 나올 거고요.”
일본은 1980~1990년 ‘소니’ ‘도요타’ 등 세계적 브랜드와 도자기 등 전통 문화를 기반으로 ‘이세이미야케’ 등 패션 브랜드의 글로벌화를 성공시켰다.
우리 또한 일류 상품을 만드는 ‘삼성’을 보유했고, 문화적 성숙도를 갖췄으며 국가적 이미지도 상승했다. 여기에 음악, 영화, 음식 등 한류의 영향까지 작용한다면 한국발 글로벌 패션 브랜드를 만드는데 승산이 있다는 것이다.
“이미 국내 패션업계에도 회사 규모에 상관없이 디자인 인력, 브랜드 포지셔닝, 퀄리티 등을 잘 갖춘 브랜드들이 있습니다. 중장기 플랜을 갖고 잘 준비해 나가면 코리아 DNA를 지닌 인더스트리얼 헤리티지 브랜드를 탄생시킬 수 있을 겁니다.”

◇ 다음 세대를 위해 준비해야 지속성장 가능
박은관 회장은 시몬느의 미래를 위해 세 가지 신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지난 30년간 제조업을 통해 쌓은 탄탄한 기반을 통해 다음 세대를 준비하겠다는 것이다.
첫 번째는 브랜드 인큐베이팅 사업이다. 가능성 있는 디자이너 브랜드를 찾아내 디자인과 생산 뿐 아니라 브랜드 성장을 위해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는 것이다. 이미 ‘레베카 밍코프’와 같은 브랜드에 참여하고 있다.
또 시몬느인베스트먼트와 같은 투자회사를 설립해 파이낸싱 비즈니스를 펼치고 있다. 이 사업은 ‘마이클 코어스’가 상장할 당시 주 거래처인 시몬느를 방문한 아이비뱅크 관계자들이 핸드백 산업에 인사이트를 지닌 시몬느가 가능성 있는 브랜드를 선정하는 데 도움을 달라고 요청했기 때문이다.
시몬느는 국내외 금융권으로부터 투자를 받아 브랜드 발굴 및 육성사업을 펼칠 예정이다.
마지막으로 자체 브랜드인 ‘0914’. 정식 출시 예정일인 2015년 9월 14일에 앞서 2년간 프리 마케팅을 진행할 만큼 정성을 기울이고 있다. 그간 내수 기업의 ‘빨리 빨리’에 익숙한 기자가 지나치게 느긋하다는 표정을 보이자 박 회장은 “앞서 말씀드렸듯 지난 27년간 시몬느는 한결같은 길을 걸음으로써 전세계 럭셔리 핸드백 시장의 9%를 감당할 만큼의 헤리티지를 만들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지금 준비하는 ‘0914’는 최소 30년 미래를 바라보고 준비하는 사업”이라며 여유롭지만 신념이 가득찬 ‘헤리티지 경영철학’을 자신있게 밝혔다.
시몬느 연혁
1987 시몬느 설립, DKNY 컬렉션 수주
1998 수출의 날 500만 달러 탑 수상
1989 수출의 날 1000만 달러 탑 수상, 대통령 표창 수상
1990 뉴욕 지사 설립
1992 100% 단독 출자로 중국 광저우에 해외 공장 설립
1996 수출의 날 5000만 달러 탑 수상
1997 인도네시아에 해외 공장 설립
2000 무역의 날 수출 1억 달러 탑 수상
2003 의왕시에 본사 신사옥 준공 및 이전
2006 시몬느FC 설립
2009 베트남 호치민 공장 완공
2011 베트남 띠엔장 공장 완공
2012 국내 최초 핸드백 박물관 개관
정인기 기자, 최은시내 기자
ingi@fi.co.kr, cesn@f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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