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제 마지막이다라는 생각으로 대한민국 패션대전에 지원했어요. 20대 아이들과 겨룬다는 것이 마음속으로는 창피하기도 했지만 몇 년 전에 이 대회에서 본선 입상만 했던 적이 있어 오기로 지원했죠.”
문진숙(44·한양대 대학원)씨의 장려상 수상은 패션에 대한 열정과 끈기의 결과였다. 뒤를 돌아보면 수많은 경험을 통해 실패를 겪기도 했다. 어린 시절부터 패션에 대한 꿈을 품고 있었지만 부모님의 반대에 부딪쳤던 문진숙씨는 1992년도에 에스콰이아에 입사해 우회적으로 잡화 디자이너·MD로 사회에 첫 발을 내디뎠다. 이후 우연히 친구와 함께 웨딩드레스를 디자인하고 대여해주는 사업을 시작했고, 홀로 독립해 승승장구하며 청담동에 자리잡았다.
2002년도에는 추계 서울패션위크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브랜드로 패션쇼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웨딩 매니저들에 의해 시장이 잠식되는 한계 때문에 스스로 나서 웨딩 대행 벤처를 설립했으나, 얼마되지 않아 사업은 실패로 돌아갔다. 수많은 빚과 아픈 기억으로 인해 그는 3년 간 우울증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했다.
“뷰티풀가든발레라는 발레단 모임이 있는데 어느 날 지인이 잠깐 일을 도와달라며 저를 밖으로 불렀어요. 아픔이 있는 발레리나들이 모여 공연을 하고 기부도 하는 모임이었는데 공연 이틀전에 의상 만드는 사람이 계획에 차질을 만들었던 거죠. 처음에는 급하다고 하니까 도와주게 됐는데 나중에는 그 사람들의 모습에 감동을 받아 저도 무대의상을 배우면서까지 옷을 만들어주게 됐어요.”
3년 동안 100벌 이상의 옷과 소품들을 만들어준 문진숙씨의 마음도 차츰 정화되어 갔다. 이후 한국디자인진흥원을 통해 해외 연수를 다녀오고, 두타 벤처 디자이너 컨퍼런스에 지원해 금상을 수상하는 등 다시 디자인에 대한 마음을 피우기 시작했다.
“돌이켜보니 과거에는 저도 쉽게 돈을 벌려고 생각하고, 돈과 명예를 쫓아 겁없는 용기를 부렸더라고요. 다시 차근차근 시작해보자는 생각으로 마케팅을 배우기 위해 대학원에 입학했어요. 일단은 시장 파악이 먼저라는 생각을 했거든요.”
용기를 얻은 문진숙씨는 대한민국 패션대전에 지원했다. 사실 그는 올 초 교통사고를 당해 아직까지 물리치료를 받고 있다. 당시 논문을 쓰는 것과 대회를 병행하는 것이 쉽지 않아 휴학을 하면서까지 대회에 집중했다. 앉아있기도 힘든 상황이었기에 마감 직전에 작품을 완성하기도 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코리아리즘이라는 주제가 잘못하면 뻔한 결과물이 나올 수 있기 때문에 많은 고민을 했어요. 한국의 전통 건축을 떠올렸고, 외국인들이 즐겨 찾는다는 창경궁을 예술성과 모던함으로 풀어내고자 했어요. 과거의 야경과 지금의 야경이 이어져온다는 생각으로 각각의 작품으로 만들었죠. 무엇보다도 이제는 진정으로 의상을 사랑하게 됐다는 게 제가 이번 대회로 얻은 가장 큰 결과물이랍니다.”
어쩌면 꺼내고 싶지 않았을 실패담과 자신의 이야기를 모두 털어놓은 문진숙씨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그런 그는 패션 디자이너를 꿈꾸는 어린 친구들에게 애정어린 조언도 빼놓지 않았다.
“빠르게 뜻을 이루는 친구들도 있지만 그 길만이 좋은 것이라 생각하고 우회하려는 친구들도 있어요. 그런 친구들에게 ‘느리게 걷기’가 정답이라는 말을 꼭 전해주고 싶어요. 천천히 노력하고 자신의 꿈을 가꾸다보면 때에 맞춰 꽃을 피울 때가 분명히 올 거에요.”
문진숙씨는 패션 디자인과 마케팅 등 다양한 분야를 경험하고 공부한 것을 토대로 자신에게 적합한 분야를 찾아 다시 꿈을 키워갈 계획이다. 그는 어린 시절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건강을 잘 챙기지 못했기에 자신의 몸을 돌보고, 주위 말에 귀를 기울여 필요한 곳에 도움을 주며 삶의 의미를 찾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상을 받았다고 해서 뚜렷히 뭐가 되고 싶다는 욕심은 없어요. 지금은 대한민국 패션대전 수상자 그룹인 프리미에르와 소통하고, 후배들에게는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또 앞으로 무엇을 하든 기부나 봉사를 통해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는 것이 저의 바람입니다.”
이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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