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퇴기 접어든 한국 패션산업, 해외 진출 서둘러야
12년전 국내 한 신문에 ‘국내 박사가 美대학 교수로 발탁’ ‘교수 채용 폐쇄성 탈피돼야’란 기사와 칼럼이 잇달아 실린 적이 있었다.
박사 실업이 한창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가운데 순수한 국내파 박사가 미국 오클라호마대학 부교수로 발탁됐다는 내용이었다.
그 주인공인 진병호(48·여) 박사. 2009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의 요청으로 석좌교수로 자리를 옮긴 그는, 그간 열정적인 연구와 활동을 해온 인터내셔널 리테일 전문가로 유명하다. 오로지 실력으로 승부해온 그는, 대학에서 Putman & Hayes 기금도 받고 있다.
곧 미국으로 돌아가는 그는 “한국과 미국의 패션·섬유시장과 글로벌 마켓, 글로벌 리테일을 두루 연구한 만큼, 한국 패션 섬유업계 발전을 위해 도움이 되고 싶다”고 희망을 밝혔다. 그에게 한국과 미국 패션 시장의 차이를 비롯해 해외 시장 진출시 주의점, 글로벌 SPA 브랜드와 한국 SPA 브랜드의 차이 등 한국 패션 시장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들었다.
- 미국 패션 시장과 한국 패션 시장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궁금하다.
“미국 패션 시장과 한국 패션 시장은 많이 다르면서도 문제점은 비슷하다. 미국 시장이나 한국 시장이나 지금 쇠퇴기다.
의류 산업의 발달 단계에서 쇠퇴기의 특징은 고용 감소와 공장 폐쇄, 해외 소싱 증가, 무역 적자 등이다. 미국은 지금 97%를 글로벌 소싱에 의존한다. 나머지 3%는 패션의 중심 아이템이 아닌 양말이나 스타킹, 의료용 가운, 군복 등으로 기계식 대량 생산에 의존한다.”
- 쇠퇴기의 해결책은?
“인터내셔널라이제이션(interna tionalization), 즉 국제화다. 해외 시장으로 나가야 한다. 미국은 국토가 넓어 미국 시장에서 다 해결되지만, 한국은 해외 진출과 시스템화, 신소재 개발로 부가가치를 일으켜야 한다. ”
- 해외 시장 진출시 주의점은?
“반드시 그 나라 소비자의 행동 특징, 성향, 토착 문화, 국민 정서 등에 대한 사전 조사와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 비교 문화 차원의 소비자 행동 연구라 할까. 또 우리나라 옷은 사이즈가 55, 66, 77, 88 등 몇 개 밖에 없다. 하지만 해외에 진출하려면 미국처럼 00에서 18까지 다양한 사이즈를 갖추고, 키와 볼륨을 배려한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
- 최근 한국에는 글로벌 SPA 브랜드들이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제일모직, 신성통상, 이랜드 등 한국 기업들도 SPA 브랜드에 공을 들이고 있다. 글로벌 SPA 브랜드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자라」를 예로 들어보자. 「자라」는 많은 점에서 일반 상식과 반대로 간다. 일반 기업들은 ‘규모의 경제’ 때문에 일정 수량 이상으로 대량 생산하고, 공장도 꽉 채워서 빈틈없이 가동한다. 하지만 「자라」는 모델마다 제품 수량을 조금씩 만들고, 공장의 생산 라인도 일부는 늘 비워둔다. 또 몇만원에 불과한 싼 제품들도 배로 운송하는 법이 없다. 모두 비행기로 보낸다. 비행기로 빠른 회전율(turn over)을 구현한다. 또 세계 각국 스토어에서 IT 기기로 본사에 매일 실시간 판매 동향을 보고하고, 전세계 스토어 매니저가 소비자 니즈를 반영한 잘 팔리는 제품의 재생산을 지시할 ‘오더’(order) 권한을 갖고 있다. 또 디자인도 조금씩 변형시켜 재생산한다. 그러니 매일 매일 「자라」 본사는 전 세계 소비자 동향을 파악하고, 매니저 오더에 따라 ‘반응 생산’에 투입, 비행기로 유럽은 2일 안에, 아시아는 3-5일 안에 배달한다. 유행이 지나면 소비자가 찾지 않으니까 빨리 제 시즌에 제품을 팔고자 하는 것이다. 시즌 제품이 다품종 소량이고, 순식간에 소진되니까 할인 판매가 거의 없고, 제 값에 판매된다. 이 점이 우리나라와 다른 점이다.”
- 국내 SPA 브랜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한국 브랜드들도 참 좋다. 품질도 좋고, 가격도 착하다. 그런데 세일을 너무 자주 한다. SPA의 핵심은 ‘정가 판매율’을 높여 수익을 남기는 것이다. 얼마 전 딸이 A브랜드에서 10만원에 7가지를 사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제일모직의 「에잇세컨즈」의 경우, 다 좋은데 코디가 다양하지 못해 아쉽더라. 그리고 글로벌SPA보다 타겟층이 너무 어리다. 사려고 마음 먹은 고객들도 돈을 쓰기가 힘든 상황이다. 해외에 진출하려는 SPA일수록 사이즈도 다양하게 만들어야 한다. 또 한국 SPA들은 브랜딩과 서플라이 체인 매니지먼트(SCM)를 잘해야 한다. 유능한 VMD, 샵마스터, 매니저도 부족하다. 설명 듣지 않고 알아서 골라 입을 수 있는 소비자가 많지 않기 때문에 전문가들이 필요하다.”
- 우리나라 동대문 시장은 어떻게 보는가?
“동대문 시장은 세계적으로도 경쟁력이 높다. 하지만 문제는 디자인 하나 하나는 다 훌륭한데 패션스토어라면 갖춰야 할 구색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또 옷을 입어보기도 힘들도 코디도 힘들고, 어디에 어떤 제품이 있는지 찾기가 어렵다. 이런 점이 개선된다면 동대문은 참 훌륭한 곳이다.”
- 최근의 관심사는?
“이탈리아와 우리나라가 비슷한 점이 많다. 장인정신이나 디자인 감각, 가족 중심 문화 등. 국내 패션 시장 분석에 도움이 될 것 같아 이탈리아를 연구하고 그들과 콜래보레이션 작업도 한다. 아마도 국내에서만 있었다면 안 보였을 것을, 해외에서 한국을 바라보니 보이는 것도 있다.”
- 한국 패션을 세계화 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해외서 보면 우리나라처럼 경쟁력있는 훌륭한 문화유산과 디자인, 손기술이 뛰어난 나라도 많지 않다. 칠보, 조각보, 나전칠기, 한지, 한복, 노리개, 조각보, 매듭, 전통공예 등이 모두 훌륭하지 않나. 구찌 뱀부 백이 있지만, ‘뱀부’(대나무)는 원래 우리 것 아닌가. 톱 디자이너는 늘 독특한 소재와 데코레이션을 갈망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면 몽블랑 만년필에 칠보를 조금 콜래보레이션한다거나, 모시인데 디자인은 프라다식이라거나…적절히 파괴시켜야 하나의 새로운 것이 생겨난다. 다만 시스템 개선이 따라주지 못하는 게 아쉽다. 하지만 지금이야말로 한국 패션이 뻗어나갈 적기이다.”
- 왜 지금이 적기라고 보는가?
“한류가 뜨고 있고, 동아시아권에 대한 세계인의 관심이 높다. 중국이 더 크기 전에 우리나라가 뭔가 해야 한다. 시기적으로도 한국 낭자들이 세계 스포츠 무대를 석권하는 등 우리나라 이미지가 좋지 않은가. 또 우리만큼 글로벌 마인드를 가진 민족도 드물다. 게다가 중소기업이 잘 할 수 있는 산업이 패션이다. 한 사람만 잘 하면 기업을 일으킬 수 있는 부가가치 높은 산업이다. 더구나 한국은 IT산업이 우수하지 않나. 패션산업은 IT산업과 함께 가는 것이다. 국내 브랜드가 해외에 가면 어려움이 많겠지만, 익숙해져야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다. 서플라이 체인 단계별로 긴밀한 협력이 필요하고, 정보가 공유되면서 업체들이 소비자의 니즈를 ‘반응 생산’해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
이화순 기자
lhs@fi.co.kr
- Copyrights ⓒ 메이비원(주) 패션인사이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