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능하면 패션 용어를 우리 말로 순화해서 쓰고 싶지만, 유독 ‘스트리트 패션’을 ‘거리 패션’으로 옮겨 쓰기에는 그 단어가 함유하고 있는 패션사적 의미가 사라지는 것 같아 꺼려진다. 스트리트 패션도 일종의 고유명사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1950년대까지 유럽 상류층의 의상은 대중들에게 동경의 대상이 되어왔다. 디자이너의 오뜨 꾸뛰르 패션쇼는 일반 대중들에게까지 영향을 끼쳤다. 고급 문화가 일방적으로 대중에게 영향을 끼치던 시대였다. 대중들은 잡지나 TV를 통해 간접적으로 접한 패션을 집에서 만들어 입거나 카피본을 사 입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후 태어난 베이비 붐 세대가 10대가 되자 기성 세대와는 다른 패션에 대한 수요와 공급이 일어나며 거대한 시장을 형성하게 되었다.
베이비 붐 세대라는 거대한 대중 집단의 등장은 결과적으로 대중 음악, 대중 예술 등 대중 문화의 발전을 가져왔다. 스트리트와 매체는 상호작용을 하며 새롭고 다양한 트렌드를 확산시켰다.
테디보이 스타일, 모즈 룩, 미니 스커트, 청바지, 장발 등이 그 예이다. 특히 1960년대 런던의 카나비 스트리트는 그 시대를 설명하는데 있어 빠지지 않는 장소로 등장한다. 길거리에서 청소년들이 입고 다니던 패션이 되려 고급 패션에 영향을 미치는 지경에 까지 다다른 것은 충격적인 현상이었다. 이전까지 문화란 폭포와 같아서 일방적으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만 흐른다고 생각하던 때였으니, 이러한 역전 현상은 이후 패션계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제 거리는 또 하나의 런웨이가 되었다. 과거처럼 일부 귀족층만 잘 차려 입고 사교 무대를 누비는 것이 아니다.
대중들은 한껏 멋을 내고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서로를 곁눈질 하고, 새로운 트렌드를 받아들이고, 자신의 아름다움을 봐주길 바란다. 특히 21세기 들어 스타들의 길거리 파파라치 컷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차려 입은 레드 카펫이나 행사장의 포토월의 옷차림보다 사람들에게 더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대중들은 그들의 자연스러운 일상에서의 접근 가능한 아이템들을 눈여겨보며 새로운 유행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샤넬’의 2015 SS 컬렉션은 이러한 스트리트 패션의 영향력을 꿰뚫어 본 칼 라거펠트의 신의 한 수였다. 칼 라거펠트의 ‘샤넬’ 패션쇼 키워드 선정과 그것을 실현하는 능력은 정말 놀랍다.
스트리트 패션이 ‘샤넬’이라는 브랜드와 만났을 때 보여 줄 수 있는 다양한 패션이 등장했으며, 중간중간 파리의 보도블록을 패션으로 옮겨온 깨알 같은 디테일이 살아 있었다. 거리를 행진하는 성난 시위대처럼 피날레에 등장한 모델들의 몇몇 피켓에는 가슴을 울컥하게 만드는 문구들도 있었다. 그랑 팔레에 7층 높이의 건물로 파리의 거리를 재현한 칼 라거펠트는 사람들이 무엇을 기대하고 보고 싶어하는지 아는 블록버스터 영화 감독 같았다.


고학수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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