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레산드로 멘디니. 우리에게도 많이 알려진 이탈리아 디자인계의 대부라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우리나라를 적지 않게 찾으며, 국내의 많은 기업들과 일한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우리에게도 이젠 낯설지 않은 '안나 G'가 있다. 너무 많이 알려져서 오히려 식상해 보일 수도 있는 디자인이다. 그러나 이 디자인에 담긴 묘미는 아직 식상해질 만큼 알려져 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만큼 숨겨진 매력이 많은 디자인이다. 그리고 디자이너 알레산드로 멘디니를 이처럼 그대로 드러내는 디자인도 없다.
우선 이 안나 G는 와인 오프너이다. 사람 모양새를 하고 있다는 게 특이하다. 와인 오프너이긴 하지만 어딜 봐도 조신하고 우아한 여성의 자태가 묻어난다. 길다란 목이 갸름한 얼굴을 받치고 있고, 단정하게 자른 단발이 조신하기 그지 없다. 우아하게 흐르는 가느다란 팔은 자칫 유머러스 해보일 수도 있는 분위기를 한옥 지붕의 우아한 선처럼 잘 정돈하고 있다. 아래로 내려가면서 완만하게 풀어지는 곡면 또한 드레스를 연상시키면서 전체적으로 우아함을 극대화하고 있다.
전체의 형태가 이 정도면 꾀나 교육의 혜택을 많이 받은 듯한 외모이다. 기하학적 모양으로 추상화한 외모이지만 보는 사람의 마음을 무장 해제시키는 매력이 있다. 살아있는 사람이라도 이 정도로 우아함을 갖추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이건 인형이 아니라 와인 오프너라는 사실. 보는 사람들의 선입견과 미적 감수성을 근본적으로 흔들어 놓는다. 이런 다면적인 대상을 무엇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선택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예쁜 인형처럼 보아야 할지, 그냥 와인 오프너로만 대해야 할이지, 물건에 대한 일정한 입장이 이 물건 앞에서는 여지없이 혼돈에 빠져 버리는 것이다. 오히려 그런 틈새로 묘한 유머와 깊은 마음의 평화가 스며들어 온다.
유머스러우면서도 우아한 겉모양과, 이런 형태가 촉발하는 유머러스한 느낌과는 달리 사람들의 마음을 마음대로 쥐었다 폈다 하는 멘디니의 위대한 디자인 솜씨를 읽어 낸다면 이 디자인의 묘미를 한 껏 느낄 수 있는 단계에 올랐다고 할 수 있겠다. 안나 G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알레산드로 멘디니의 디자인은 세련된 외모로 잘난 척 하거나 강렬한 이미지로 보는 사람의 눈을 후벼 파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천진난만한 모습으로 잔잔하게 우리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며 파고드는 특징이 있다. 이 디자이너가 왜 세계적인 명성을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는지를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대체로 디자이너들은 물건의 아름다운 외향이나 독특한 쓰임새로 세인들의 관심을 끌려고 하는 게 일반적이다. 그것말고 어필할 수 있는 것이 없기도 하다.
하지만 멘디니 같은 거장들에 대해 놀라는 것은 그런 실질적인 한계를 뛰어난 창조성과 통찰력으로 가뿐하게 뛰어넘어서 인간의 보편적 상황을 정확하게 짚어낸다는 것이다. 디자인에 인문학이 필요하다라는 따위의 수사학은 이런 디자이너들의 디자인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한다. ‘안나 G’라는 이름은 알레산드로 멘디니의 애인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자기 여자친구가 기지개를 켜는 모습을 보고 이 와인 오프너의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발상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디자이너라면 응당 소비자들의 요구사항을 잘 헤아려 기능적인 대안을 내놓으려고 온갖 방법론들을 동원하지만, 알레산드로 멘디니는 그런 고생들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무시해버린다. 창의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이 창의력을 억지로 끄집어 내려고 온갖 방법론들을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적용하려 하지만, 이런 디자이너들은 보는 관점만 살짝 옮겨서 그런 문제를 가볍게 해결하고 있다.
와인 오프너로 사용할 때는 일반 오프너를 쓸 때와 똑같이 하면 된다. 와인 병에 주둥이에 이 물건을 씌워서 머리를 돌리면 안나 G의 팔이 만세를 부르는 자세로 올라간다. 그 다음엔 두 손으로 안나 G의 팔을 잡고 아래로 살짝 내리면 경쾌한 소리와 함께 코르크 마개가 빠진다. 사용하는 것 자체가 재미있다. 알레산드르 멘디니는 단지 모양만이 아니라 행위의 즐거움까지 디자인 한 것이다.
최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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