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5년 프랑스의 생나제르의 페노 조선소에서 건조된 노르망디호는 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도는 가운데 생겨난 호화 여객선이다. 당시로서는 최고의 여객선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과 제 2차 세계대전 기간에 유럽의 강대국들은 경쟁적으로 호화 여객선 건조와 선박의 속력 경쟁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는데, 이 때 프랑스를 대표하여 노르망디호가 탄생하였다.
이 배는 당시 프랑스 르아브르 항을 출항하여 처녀 항해에서 당시로서는 가장 빠른 속도로 4일 만에 미국 뉴욕에 입항하여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이러한 여객선의 속도 경쟁은 당시에 전쟁 중 군함에 적용될 수 있는 최신의 엔진 개발을 위한 강대국간의 경쟁으로 볼 수 있다.
프랑스 인들의 노르망디호에 대한 자부심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는 위의 사진에서 나타난 핸드백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지금 관점에서 보면 패션 강국이었던 프랑스에서 이런 핸드백이 등장하였다는 것이 좀 이상하게 보이기도 한다.
오늘날 까지 유행하는 트렌치 코트가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군 장교의 군용 기능성 방수복이었던 것처럼, 사회 정치적 사건이 당대의 패션이나 일상 문화에 끼치는 영향이나 사례는 빈티지 코드에서 많이 발견된다.
7,80년대의 한국 사회는 당시 패션 선진국들처럼 문화적 다양성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이를테면 빈티지 코드에서 70년대 히피 문화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에도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당시의 문화를 향유하고 소비했던 세대들로부터 행복했던 그들의 낭만적 경험을 기대할 수 없는 현실인 것이다. 부정적이고 퇴폐적이었던 당시의 오해들은 최근 복고 열풍으로 등장하는 “ 고고 70” 같은 한국 영화에서 소개되기도 하였다.
좀더 자유로운 사고와 문화를 향유할 수 있었던 당시 패션 선진국들의 젊은이들이 만들어낸 반문화는 오늘날까지 그들의 패션이 세계의 모든 젊은이들에게 동경의 대상이 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당시 파격적이고 혁명적인 신인 디자이너들이 등장했던 유럽의 기성 세대들은 이러한 반체제적이고 도전적인 패션의 영향이 21세기까지 영향을 끼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회 전체가 다양성을 존중하지 않는 경직된 분위기에서는 창의적인 디자인을 기대하기 어렵다. 또한 그것을 수용하고 즐기는 소비자들의 다양한 취향이 존중 받아야 한다. 패션은 생산자 역할의 디자이너나 브랜드를 소유한 기업 만의 것이 아니라 그것을 소비하는 소비자의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노르망디호는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전쟁을 피해서 미국 뉴욕으로 뱃머리를 돌렸다.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 항복하자 미국 정부는 이 배를 군함으로 개조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개조 작업 도중 화재가 발생하여 전쟁에 사용되지 못하고 1946년 해체되어 버리고 만다. 프랑스인들에게는 잊어버리고 싶은 역사의 흔적이겠지만, 정치적 상황이 만들어낸 노르망디 호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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