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대는 프로방스라는 이름을 아는가? 그 존재를 모르고서는 감히 문학과 미술을 말할 자격이 없다고 말해도 좋을만한 ‘우리들’ 마음의 고향. 한 번 쯤 그 빛나는 태양 속에 머물기를 꿈꾸지만 실제로 다가서기는 결코 쉽지 않은 곳. 행운의 여신은 마침내 프로방스를 만나는 기쁨을 안겨준다. 《떠난다, 문을 연다, 깨어 일어난다, 라는 동사들 속에는 청춘이 지피는 불이 담겨 있다. (중략) ‘행복’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때는 이미 너무 늦었다.》 김화영 선생님의 글은 언제나, 언제나, 지중해로, 지중해로, 깨어 일어나 문을 열고 떠나도록 부추긴다. <글.정인희(ihnhee@kumoh.ac.kr)| 금오공대 교수>
청춘이 지피는 불이 아직 남아 있는지 아닌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프로방스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꼭 풀어야 할 숙제 같은 것이었다. 기차 시간표도, 비행기 시간표도, 주말을 이용해 프로방스를 방문하기에는 도무지 마땅찮다. 며칠간 머리를 싸매고 궁리에 궁리를 거듭한 끝에 금요일 늦은 오후, 한주의 일과가 모두 끝난 시간에 맞추어 산레모(Sanremo)행 기차를 탄다. 산레모 가요제로 널리 명성을 떨치고 있으며, ‘꽃의 도시’라는 별칭도 갖고 있는 곳.
사실 산레모 가요제를 볼 때만 해도 산레모에 간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던 일이다. 2007년 산레모 가요제는 2월 27일부터 3월 3일까지 개최되었는데, 첫날에는 ‘오늘 산레모 가요제를 하는구나.’ 하고 텔레비전을 켠 채로다른 일을 하다가, 이틀째, 사흘째, 매일 반복되는 멜로디에 귀가 익숙해지고 몇몇 아주 뛰어난 노래들에 흥미가 가기 시작하면서 마지막 날에는 텔레비전에서 눈을 떼지 않고 가요제 결과를 지켜보게 되고야 말았다.
우승은 <네게 장미 한 송이를 선물할거야(Ti regalero una rosa)>라는 노래로 시모네 크리스리키(Simone Crisricchi)가 차지했으며, 신인상은 <생각해봐(Pensa)>라는 노래를 부른 파브리치오 모로(Fabrizio Moro)가 받았다. 산레모 가요제는 아마추어들의 경연대회가 아니라 기성가수들도 참여하여 신곡으로 실력을 겨루는 무대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더 이상 예전의 산레모가 아니야.’ 하면서 머리를 흔들지만, 마지막 날 들은 노래들은 감동적이고 인상적이다.
본 죠르노(buon giorno)에서 봉주르(bon jour)로
가요제가 모두 끝난 다음날인 일요일 오후에는 아니나 다를까 산레모 가요제에 대한 얘기를 나누는 특별 프로그램이 방송된다. 이탈리아에서는 중요한 행사를 치르고 나면 꼭 그에 대한 결과를 정리하는 대담 프로그램을 편성한다. 말하는 것을 즐겨하니, 무언가 한 마디 하지 않고는 도무지 넘어갈 수가 없는 것이다. 미스 이탈리아 선발대회가 끝나고도 그랬지만, 중요 축구 경기가 끝나고 나서도 꼭 이런 프로그램이 뒤따라 나온다.
가수들의 인기는 노래와 더불어 외모도 영향을 받는 요소인지라, 아마도 대상을 받은 시모네보다는 신인상을 받은 파브리치오의 인기가 더 높아 보인다. 월요일에는 이미 산레모 가요제 CD가 음반점에 진열되어 있다. 한국에서는 어떤 신인가수가 있는지 어떤 새 노래가 나왔는지 더 이상 관심을 가지게 되지 않은지 오래지만, 이국땅에서 새롭게 어떤 가수나 어떤 노래를 좋아하게 되는 심리적 메커니즘은 무엇인지 스스로도 궁금해 하며 CD를 집어 들고 계산대로 향한다.
가요제가 끝난 산레모는 한산하지만, 그래도 항구를 따라 늘어선 카페들은 늦게까지 손님들을 끌며 불을 밝히고 있다. 모나코, 니스, 칸느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지중해 해안에 면한 도시. 드디어, 이 역사적인 순간에, 프랑스 리비에라로 이어지는 이탈리아 리비에라에 와 있는 것이다. 영원히 책 속에서만 존재할 것 같았던 이름 ‘리비에라’.
프로방스에 이르기 위해서는 산레모로부터 지중해 연안을 따라 프랑스 남부로 넘어가야 한다. 자동차로 네 시간 정도 걸리는 여정이다. ‘본 죠르노(buon giorno)’의 나라에서 ‘봉주르(bon jour)’의 나라로 이르는 길, EU 형성 이후 국경은 그 의미를 상실했고, 다만 자동차 번호판만이 이탈리아 차량인지 프랑스 차량인지를 구분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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