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의 명의 허준
신비의 도인으로부터 도교 의학을 전수 받고, 유의태를 비롯한 여러 향토 명의들로부터 향의를 배운 허준은 20대 초반부터 명의로 소문이 난다. 이 시기의 허준에 얽힌 이야기는 그 당시 유명했던 선비들의 문집이나 일기에 조금씩 기록되어 있다. 특히 미암 유희춘이 쓴 미암일기(1567-77)에는 허준이 예의바르고 실력 있는 명의로 소개되고 있다.
유희춘은 명종때 을사사화를 당해서 제주도와 종성으로 유배를 당했지만, 선조가 즉위하자마자 곧바로 등용됐던 선비였다. 그의 타고난 기억력과 총명함을 선조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인데, 유희춘에 얽힌 재미난 설화를 소개한다.
명종때 반대파의 모함으로 제주도로 귀양을 갔던 유희춘은 집권세력을 간접적으로 비난했다는 ‘양재역’ 벽서 사건에 연루되어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지를 옮기게 되었다. 배를 타고 망망대해를 건너던 도중 갑자기 폭풍이 일어나 파도가 험해져서 함께 항해하던 세 척의 배가 침몰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유희춘이 타고 있는 배도 높은 파도에 휩쓸렸고, 배 안의 모든 사람들은 공포의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유희춘은 그야말로 태연자약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
천고만신 끝에 배가 육지에 닿았을 때 사람들은 그를 이인(異人)이라고 칭송했으나, 그는 “올바른 일을 하는 사람은 하늘이 보살핀다”며 다시 귀양길을 재촉할 뿐이었다.
후에 선조는 유희춘을 불러 대사헌의 벼슬을 주고 고전에 대한 강독을 부탁했다. 또한 왕이 고서를 보다가 궁금한 내용이 있으면 유희춘에게 직접 물어보았는데, 유희춘은 한번도 막힘이 없이 동서고금의 책을 인용하여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이에 선조는 유희춘을 ‘살아있는 백과사전’이라고 공인하게 됐다.
이러한 유희춘은 청년 허준의 의술을 깊이 신뢰하고 있었다. 유희춘이 오랜 귀양생활에서 얻은 질병이 재발하거나, 집안에 일이 있을 때에는 허준이 그의 집을 방문하여 의학적 조언을 하거나 직접 치료를 해 주었다. 유희춘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허준에게 내의원 천거장을 써 주기도 하고, 친구들에게 허준을 소개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허준에게 치료를 받은 사람은 송순을 비롯하여 대부분 서울에서 관직을 하고 있는 양반들이었다.
물론 유희춘을 찾은 의사들은 허준만이 아니었다. 당시 유명했던 명의들이 유희춘의 집을 들락거렸는데, 이 중에는 양예수의 이름도 보인다. 아마 유희춘이 정2품의 벼슬을 하고 있는 고위 관료였기 때문에 왕의 측근들과 고위 관료의 질병을 치료하는 전의감에 근무했던 양예수가 그의 집을 방문했을 것이다. 이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유희춘을 매개체로 하여 허준과 양예수가 사제지간이 되었다고 하는 학설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유희춘의 미암일기에는 허준과 양예수가 함께 자리를 했다는 내용이 전혀 없으며, 유희춘과 양예수가 매우 절친했다는 증거도 없다. 결국 허준은 내의원에 들어가서 양예수를 만났다고 하는 학설이 정설로 굳어지고 있다. 하여간 청년 허준은 민초로부터 의술을 인정을 받기보다는 서울 양반들에게 먼저 인정받으며 화려하게 등장하게 된다. 다음 편에는 허준이 내의원에 들어가는 과정을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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