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방돔 럭셔리 트레이드페어’에 참여한 「쿠론」 |
제일모직, 코오롱 등 패션 대기업들이 실력있는 디자이너 브랜드를 지원하면서 동시에 기업의 이익도 추구하는 적극적인 상생 경영으로 주목 받고 있다.
지난 연말 디자이너 이보현의 구두 브랜드 「슈콤마보니」를 인수한 코오롱인더스트리 FnC부문. 이미 2010년 핸드백 브랜드 「쿠론」과 2012년 여성복 「쟈뎅드슈에뜨」를 인수해 대기업의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코오롱인더스트리는 「쿠론」 을 지난해 매출 400억원에 순이익 39억원짜리 알짜 브랜드로 도약시켜 업계를 놀라게 한 데 이어 2015년까지 「쿠론」 1000억원, 「슈콤마보니」와 「쟈뎅 드 슈에뜨」로 각각 500억원 등 디자이너 브랜드에서만 2000억원의 매출을 올리겠다고 밝히는 등 강한 자신감을 나타내고 있다.
제일모직도 이미 2003년 「구호」에 이어 2011년 「준지」를 인수하고 정구호 전무와 정욱준 상무를 적극 지원하고 있다. 정구호 전무는 「헥사바이구호」 외에도 제일모직 내의 여러 브랜드의 디자인에 직간접으로 참여하며 디자인 디렉터 역할을 하고 있다.
정욱준 상무의 「준지」는 제일모직의 자금과 시스템이 뒷받침되면서 파리와 뉴욕, 이탈리아, 러시아, 홍콩 등지서 잇단 러브콜을 받고 있다. 올 가을에는 디퓨전 라인 「준.준지(JUUN.JUUNJ)」를 론칭할 계획이다.
또 제일모직은 지난해 SPA브랜드 「에잇세컨즈」를 통해 제8회 삼성패션디자인펀드(SFDF) 수상자인 디자이너 최유돈, 최철용과 콜래보레이션 라인을 선보여 호평 받았다. 2006년 첫 수상자를 배출하기 시작한 삼성패션디자인펀드는 매년 2~3명의 유망 디자이너를 선발 후원하는 제도다. 지난해까지 19팀에게 컬렉션에 소요되는 비용을 연간 10만 달러씩 지원했다.
SK네트웍스는 2008년 디자이너 강진영?윤한희가 설립한 오브제를 인수해 자사 패션사업의 한 축으로 구축했다. 아쉽게도 1년 만에 SK네트웍스를 떠나 성공 모델로 볼 수는 없지만 당시만해도 자신의 브랜드를 중견 패션기업으로 성장시킨 디자이너와 대기업의 만남으로 이슈를 모은 케이스다.
지난해에는 중견 패션기업 더베이직하우스도 구두 디자이너 이겸비씨가 운영하던 「겸비」를 인수하고 이씨를 이사로 영입했다.
베이직하우스는 올 가을 베이직하우스의 느낌을 가미한 신제품을 준비 중이다. 이씨는 이신우, 빈치스벤치 등을 거쳤고 2007년 세계도자비엔날레, 2009년 상해패션박람회에서 짚신을 변형한 신발 등을 선보이며 실력을 인정받은 국내파 구두 디자이너다.
브랜드인덱스도 디자이너 이대웅씨가 론칭한 스트리트 캐주얼 브랜드 「크리틱」의 영업권을 인수해 국내외 전개를 앞두고 있다. 이밖에 몇몇 중견 여성복 기업도 핸드백과 구두 전문 디자이너 브랜드를 대상으로 인수 협상을 진행 중이다.
◇ 디자이너와 기업의 만남, 왜?
최근 디자이너 브랜드의 M&A는 한계에 부딪힌 국내 패션기업에게 ‘새로운 성장 모델 개발’이란 화두를 던지고 있다.
지난 30여년 동안 ‘대규모 자본 투입-단기간 고성장’ 모델이 국내 패션 산업의 성장을 이끌어왔다. 하지만 최근 4~5년 사이 시장이 급속도로 성숙기에 접어들면서부터는 신규 론칭 과정에서 막대한 초기 투자비용을 들이고도 성공 확률을 보장할 수 없게 됐다. 결국 근래 들어서는 신규 브랜드 론칭이 도박에까지 비유될 정도로 진입 장벽이 높아진 것이 기업의 디자이너 브랜드 인수를 부채질하는 이유다.
일반적으로 디자이너 브랜드는 규모가 영세하고 마니아적인 성향이 강해서 볼륨화하는데 한계가 있다고 인식돼 왔지만, 경영관리 능력과 자본을 가진 기업과 만나 새로운 성장 모델을 만들고 있다.
수년 동안 자신의 브랜드를 운영하면서 확보한 안정적인 고정 고객과 함께 소비자들로부터 인정받은 브랜드력이 있기 때문에 기업의 자본과 시스템을 결합해 성장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코오롱이 브랜드를 인수하면서 디자이너와 관련 스탭을 함께 영입해 디자인 개발과 소싱, 브랜딩에 대한 그들의 전문성을 최대한 보장해준 것도 이러한 배경 때문이다. 코오롱에서는 기획 및 영업 MD만 투입시켜 최대한 효율을 낼 수 있는 방안을 찾았다. 또 유럽과 미국 등 해외 유력 전시회에서 쌓은 바잉 노하우를 활용해 ‘해외 홀세일’ 영역도 개척하고 있다.
‘K팝’에 이어 K패션에 대한 기대치는 높지만, 기존 내셔널 브랜드로는 기획 시스템 등 체질적인 한계가 있다. 그러나 디자이너 브랜드는 출발부터 수주제에 익숙하기 때문에 글로벌 비즈니스가 원활하다는 것이다.
또 국내 패션시장 환경은 셀렉트숍이 활성화하고, 주요 브랜드들이 매장 규모를 확장하면서 새로운 ‘콘텐츠’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것도 전문 브랜드 인수를 부추기는 요인이다. 상업성 위주의 기존 브랜드들로는 다양하고 개성 있는 제품을 선호하는 젊은 소비자들의 취향을 맞추기 어렵기 때문에 기업의 틀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개성과 상품성을 동시에 갖춘 디자이너 브랜드를 인수, 콘텐츠로 활용하는 동시에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만드는 일석이조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 디자이너 ‘제대로 해 볼 기회’ 반겨
디자이너들은 ‘기업의 자본과 시스템을 활용해 내 브랜드를 제대로 키워볼 수 있다’는 입장에서 반기고 있다. 소유권이 대기업으로 넘어간다는 아쉬움은 있지만 자금과 매니지먼트 능력이 뛰어난 기업과 제휴함으로써 자신의 이름을 건 브랜드를 성장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미 해외에서는 이름 있는 패션기업이 자신의 브랜드를 인수한다는 사실 자체가 대외적으로 실력을 인정받는 방법 중 하나이기 때문에 국내 디자이너들도 적극적으로 이를 선호하는 분위기다.
이러한 현상은 론칭 5~6년이 지나 안정적인 운영 구조를 갖춘 디자이너들에게서 많이 나타나고 있다. 개인이 성장시킬 수 있는 만큼은 했지만 더 높은 성장을 위해서는 기업 시스템의 접목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실제 국내에서 주목받는 수준이었던 「쿠론」은 코오롱인더스트리가 인수한 이후 과감한 투자로 해외 진출에 나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뒀다.
지난해 3월과 10월 ‘방돔 럭셔리 트레이드페어’에 참가해 20만 달러 이상의 수주 성과를 올렸고 이탈리아 명품 편집숍인 ‘베르고티니(Vergottini)’ 에 입점하는 쾌거를 이뤘다. 또한 사우디 아라비아, 바레인, 아제르바이젠 등 중동의 멀티숍 및 이탈리아 베니스, 프랑스 파리, 영국 런던, 미국 뉴욕 등의 바이어들이 홀세일 수주를 받았다.
석정혜 「쿠론」 이사는 “브랜드의 성장 가능성을 확인하는 시기부터 개인이 붙들고 있어서는 한계가 있음을 느꼈다”면서 “이 시기에 코오롱과 함께하게 됐고 기업의 매니지먼트가 접목되면서 폭발적인 시너지 효과가 났다”고 말했다.
제일모직 정욱준 상무의 「준지」 2013 F/W 컬렉션(왼쪽)과 정구호 전무의 「헥사바이구호」 파리 컬렉션 출품작. |

<알립니다>
638호 특집·세계속의 한국 패션의 지면 8페이지 상단 오른쪽 사진에서, 정구호 디자이너와 정욱준 디자이너의 사진과 이름이 서로 바뀌어 실렸음을 알려드립니다.
김정명 기자
kjm@f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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