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것 속에 살아 숨 쉬고 있는 아름다움을 발견할 때마다 디자인이 산업 혁명 이후에 나타났다는 말에 강한 의문을 가지게 된다. 이 아름다운 것들이 단지 오래되었다는 이유로 디자인이 아니라고 한다는 것은 얼마나 불합리한가.
오래된 것에서 발견하는 새로운 디자인
런던을 돌아다니다 보면 새 것보다는 헌 것을 더 많이 보게 된다. 새 것마저 새 것이 아닌 척하는 경우가 많으니 거의 헌 것만 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많은 손길과 세월이 저장되어있는 골목이나 건물들을 빛나는 유리와 차가운 알미늄, 스테인레스 스틸로 바꾸어 버리는 우리의 멘탈리티와는 달라도 한참이나 다르다. 하긴 전통으로 대표되는 영국의 이미지를 생각한다면 영국에서는 새 것 보다는 오래된 것이 더 어울리긴 한다.
하지만 세계에서 최초로 산업혁명이 일어났고, 현대 과학 기술문명에 있어서는 남부러울 것이 없었던 영국이 왜 하이테크나 철, 유리, 알미늄이 아니라 전통이라는 낡은 아이덴티티를 끌어안고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왜 우리처럼 5000년 역사를 던져버리고 무균질의 기술문명에 집착 하지 않았던 것일까?
런던 곳곳에 자리 잡고 있는 오래된 것들을 보다보면 새 것보다 오래 된 것들이 대접받고 선호되는 이유를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런던 시내 곳곳에서 만나게 되는 세인트 폴 성당, 타워 브릿지, 런던 타워, 웨스트 민스터 사원 등을 보면 두툼하게 쌓여있는 세월의 흔적, 오랜 세월에도 변함없는 완벽한 아름다움, 족보가 분명한 문화적 혈통, 그리고 무엇보다도 삶에 깊숙이 스며들어 간 익숙함 등이 첨단기술이나 깨끗한 현대 재료로 이루어진 것들 보다 얼마나 더 귀한지 머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알게 된다. 게다가 이런 오래된 것들은 어떤 최첨단 기술로도 흉내 낼 수 없다. 새 것이야 얼마든지 만들면 되지만 하루, 이틀도 아니고 몇 백, 몇 천 년의 세월을 거친 것은 귀하디귀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어찌 자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런던 시내에서 가장 눈에 띄는 오래 된 것이라고 하면 타워 브리지를 들지 않을 수 없다. 돌덩어리를 쌓아 만든 두 개의 탑을 중심으로 기다란 다리가 고색창연한 모습으로 훤히 개방된 템즈 강 위에 우뚝 서 있다. 런던 초행길이라면 당장이라도 타워의 창문으로 헤리 포터가 빗자루를 타고 날아다닐 것 같은 느낌을 받을 것이다. 5층 정도의 높이니 타워라 부르기는 좀 어색하긴 하지만, 894년에 이 정도의 높이라면 요즘 100층 높이의 빌딩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높이도 높이지만 두 개의 탑이 뾰족한 지붕들을 머리에 이고 여러 가지 철골들과 어울려 다리를 이루고 있는 모습들은 고색창연함 이전에 하나의 조형물로서 아름답기 그지없다. 요즘 디자인을 하는 사람들에게도 무척이나 놀라운 교훈이 되고도 남는다. 흔히 한강이 템즈 강보다 훨씬 넓고 도도하다는 말들을 많이 하지만, 그런 한 강에 이런 다리는 하나도 없다. 원래부터 없었을까? 아쉬움이 남는다.
도심 한 복판에 여러 건물들과 어울려 있는 세인트 폴 대성당 역시 런던을 고색창연하게 만드는 데에 크게 일조하고 있다. 1710년에 건립된 건물이니 런던 타워보다는 어리긴(?)하지만 규모나 모습에 있어서는 오히려 더 숭고하고 어른스럽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규모 때문이기도 하지만, 원래 모범으로 삼았던 건물이 로마의 베드로 대성당이라 실제보다도 더 나이 들어 보이기도 한다. 어쨌건 이렇게 오래된 건물이 도심 한복판에서 영원한 현역으로 도심의 경관을 아름답고 인상적으로 만드는 데에 혁혁한 공헌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좀 눈여겨보아야 할 부분이 아닐까 싶다. 건물들 사이로 보이는 세인트 폴 대성당은 그야 말로 런던 최고의 장면이라 할만하다.
더욱이 이 건물은 그 유명한 노먼 포스터의 밀레니엄 브리지를 사이에 두고 발전소를 개조한 테이트 모던 현대 미술관과 대치하고 있다. 묘한 과거와 현대의 어울림이다.
바로 이런 것들이 런던 사람들의 예술적 취향을 고양시키고, 디자인 안목을 높이는 결정적 이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처럼 산업혁명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는 도시의 고전적 풍광들과, 새로운 것 보다는 오래된 것을 우대하는 시민들의 마음 씀씀이가 오늘날 런던을 세계에서도 유서 깊은 장소로 만들었으며, 이런 속에서 영국의 현대 디자이너들은 고전주의의 풍부한 젖줄을 받아 마시며 새로운 디자인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최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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