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라노」, 헤리티지 계승한 2014 S/S 컬렉션 발표
한국 패션디자이너 1호인 노라노(본명 노명자·85)씨가 후계자를 정하고 「노라노(Nora Noh)」 2014 S/S 컬렉션을 최근 공개했다. 「노라노」의 새로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CD)는 26년간 「노라노」와 인연을 맺어온 정금라 실장(53)이다. 두 디자이너를 서울 청담동 ‘노라노의 집’ 3층 쇼룸에서 만났다.
속눈썹과 가지런하게 정돈된 손톱, 늘씬함 몸매에 세련된 스타일… 노라노씨는 85세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는 자태였다. 조카 며느리인 CD 정 실장도 젊어 보이긴 마찬가지. 아무래도 늘 멋과 패션 속에 살다보니 그런가. 두 사람의 관계는 시이모님과 조카 며느리 사이. 노라노씨의 여동생 노현자(81) 사장이 정 실장의 시어머니다.
먼저 쇼룸에 나타난 정 실장은 깎듯하게 ‘선생님’이라 부르며 노라노씨를 모셔왔다.
정 실장의 전공은 그래픽디자인(서울대, 국립동경예술대학원 석사). 결혼 당시만 해도 이러한 길이 펼쳐질지 예상하지 못했다는 정 실장은 “옷은 마음껏 입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혼 후 1986년 미국 FIT에 입학해 디자이너의 길을 준비했고, 87년에는 노라노 뉴욕 지사에서 함께 일했다.
Q 후계자를 통해 「노라노」가 계승되었는데 기분이 어떠세요? 이제 좀 홀가분하신가요?
노라노(이하 노) : 저야 좋지요. 하지만 뒷바라지도 큰 일이에요. 국제 시장에 진출한다고 하니 도움을 줘야지요. 미국 진출은 이미 제가 73년부터 했고, 79~99년에 미국 메이시스 백화점에서 히트치고 수출까지 한 경험이 있죠. 하지만 앞으로는 젊은 사람이 해야죠.
정금라(이하 정) : 노 선생님은 63년간 패션 디자인을 해오셨어요. 앞으로도 선생님만한 디자이너가 한국에 나올 수 있을까 싶어요.
Q 특히 어떤 면에서 그렇게 생각하나요?
정 : 선생님은 옷의 구조에서부터 원단의 성질, 디테일, 봉제, 프린트, 패턴 등을 모두 잘 알고 직접 콘트롤하셨어요. 하지만 요즘 디자이너들은 모두 분업화되어 소재 개발, 디자인, 봉제 등이 모두 다 따로 이루어지고, 디자이너는 이들을 짜깁기 하듯 하죠. 또 선생님만한 패턴 메이커가 없어요.
노 : (웃으며) 이제는 나처럼 할 필요가 없어요. 또 힘들기도 하고. 생각해보면 나는 힘든지도 모르고 열심히 했죠. 하지만 시대가 달라졌잖아.
정 : 요즘 패스트 패션, SPA가 판을 치죠. 대량 생산과 하지만 SPA 브랜드를 자꾸 입다 보면 싫증날거라고 생각해요. 「노라노」도 오트쿠튀르를 오래 해온 브랜드로서 소비자의 니즈(needs)가 어디 있는지 또 니츠 마켓이 어딘지 잘 알아요. 「노라노」는 이제 하이엔드 패션과 패스트 패션의 중간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노 : 우선 사람들이 옛날만큼 옷을 중요시 하지 않고 투자도 많이 하지 않아요. 또 활동적인 캐주얼을 많이 찾잖아요.
Q 「노라노」 해외 마케팅을 적극적으로 하는데 어떻게 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정 : 아들이 해외서 공부했는데, 아들 친구들이 마케팅을 많이 도와줘요. 노라노 페이스)도 모두 영문으로 소개해요. 지난 9월 9일 2014 봄/여름 컬렉션을 발표했는데, 반응들이 좋아요. 월 스트리트 저널에서도 최근(11월 1일자) 선생님과 저, 노라노의 기사를 실었어요.
Q 옷의 가격대는 얼마인가요?
정 : 원피스를 300~350달러 가격대로 수출해요. 국내에서도 35만원 정도죠.
노 : 여자 옷이 너무 비싸요. 내 수입으로 나도 내 옷을 못 사입을 정도에요(웃음). 난 항상 여성들이 내 옷을 입고 자신감을 얻길 바래 왔어요. 또 그들을 위해 편안하고 실용적이면서도 매력적인 옷으로 해방감을 느끼길 바래 왔어요. 하지만 옷이 너무 비싸면 살 수가 없잖아요. 큰 시장에 나가서 옷값이 싸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FTA로 관세, 쿼터가 없어졌으니 미국과 중국 등 방대한 시장이 열렸고 동남아의 한류 붐도 기회죠.
Q 고객층이 다양할 것 같습니다. 손녀와 할머니 고객까지 있을 것 같아요.
노 : 40대부터 90대까지 폭이 넓죠. 4대가 고객인 집안도 있어요. 모두 대단한 집안의 VVIP들이에요. 최고령은 94세인데 따님이 몇 벌 골라가면 제일 비싼 옷으로 고른대요. 여전히 멋쟁이들이에요.
Q 돌아보면 가장 행복했던 일은 어떤 것이었나요?
노 : 어머니(KBS 전신인 경성방송 이옥경 아나운서) 덕에 일찍 옷을 좋아해서 12살 때부터 내 옷을 해입을 정도였어요. 평생 좋아하는 일을 하고 산 것이 행복한 인생을 산 거죠.
Q 그래도 아쉬운 점도 많이 있으셨겠죠?
노 : 제가 1973년에 파리 프레타포르테에 참가한 후에 미국 바이어 오더가 시작돼 수출을 시작했죠. 1978년에 미국 백화점들이 오더를 해와 1979년에 뉴욕 맨해튼 7번가에 ‘Nora Noh’란 간판을 걸고 쇼룸을 열었고요. 20년간 제 브랜드를 알렸는데 그 당시 사진 자료들을 잘 못 챙겼다는 거에요. 메이시스, 블루밍데일즈, 노드스트롬 등 유명 백화점에 「Nora Noh」가 들어갔죠. 메이시스 백화점 1층의 15면의 쇼윈도를 ㄷ자로 「Nora Noh」 옷으로 전시한 적도 있을 정도였는데 아쉬워요.
정 : 당시만 해도 바쁘게 움직이다보니 자료로 남긴다는 생각을 못했지요. 제가 노라노 미국 지사일을 할 때도 그랬어요. 연간 5만 피스나 판매되었던 시절이죠. 당시는 수출 쿼터 때문에 실크 아이템만 수출되던 시절이었죠. 우연히 고객이 지나가다 찍은 자료를 얻기도 하면서 이번 전시(12월 15일까지 신문박물관. 노라노전)를 준비했어요.
노 : 다른 분야에서는 한류로 세계로 진출하는데 패션이 선두 역할을 못하는 게 아쉬워요. 그래서 정 실장이 미국과 동남아 등지로 진출하는 게 정말 잘 한다 싶어요.
Q 선생님 이름이 미국에서는 잘 통했겠어요. 본명보다는 부르기도 쉽구요.
노 : 이름과 성이 같은 스펠인 유명인이 많죠. B.B(부르짓드 바르도), C.C(코코 샤넬), 거기에 N.N(노라노)을 얹었어요.(웃음)
Q 이번에 다시 미국 시장을 개척한다니 기분이 어떠셨나요?
노 : 내가 다시 젊은 시절로 돌아간다면 내 모든 것을 다시 다 쏟아부어서 70년대처럼 성공시킬 자신이 있어요. 이제 30년만에 다시 「노라노」가 미국 진출을 한다니 기쁘죠. 미국서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해 한국서 장사하면서도 ‘국제무대에 가려면 준비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파리, 밀라노, 로마, 도쿄, 뉴욕, 홍콩 등지를 다니며 연구를 했죠. 그런 연구가 있었기에 이번에는 우리 옷들을 30만~35만원 정도로 판매하기로 정한 거죠.
정 : 선생님의 이런 위대한 헤리티지(heritage)를 어떻게 계승 발전시킬 건가하는 고민을 많이 했어요. 그래서 파리크라상, 던킨 도너츠 등의 성공 사례까지 공부했죠.
Q 미국 진출에 많은 인재가 동원됐다는 얘기가 있던데…
정 : 미국 컬럼비아 대학 출신의 인재들이 영문 번역부터 도와 줬어요. 감사해요.
노 : 일은 즐기면서 해야 해요. 그 애들도 좋아서 하는 거죠.
Q 「노라노」 옷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는?
정 : 제 딸이 미국서 공부했는데 제가 보내주는 「노라노」 옷을 입기만 하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어디서 샀냐고 묻는다며 딸이 제게 미국 수출을 재촉했어요. 심지어 저도 LA 비버리 힐즈 레스토랑에서 그런 질문을 받았죠.
노 : 언젠가 크리스챤 디올 쇼에서 관객들이 내가 입은 「노라노」 를 보고 ‘어디서 샀느냐’고 물었던 적이 있어요. 클래식하면서도 실용적으로 보이니까 좋아하는 것 같았어요. 진짜 고급스러운 옷은 사람을 살려주지 옷이 눈에 튀지는 않아요. 하지만 자세히 보면 수수하고 고급스럽죠.
정 : 그런 일화들 때문에 이번에 글로벌 마케팅을 서둘렀답니다.
Q 꿈이 있다면…
노-정 : 「노라노」가 글로벌 브랜드가 되는 거에요. 미국, 캐나다, 중국, 대만, 태국 등지까지.
노익장의 비결을 묻자 노라노씨는 “하루 2시간씩 운동한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만사를 긍정적으로 바라본다고 했다.
정 실장이 “선생님은 너무 사람을 잘 믿어서 탈이에요” 했는데,이에 돌아온 대답은 “싫은 사람과는 일을 못하니까 내 자신을 마인드 콘-트롤을 해서 얻은 장점”이라며 미소지었다. 아울러 패션 지망생들에게 패션을 잘 하려면 미술과 수학을 잘 하고, 스스로 정확하고 엄격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화순 기자
lhs@fi.co.kr
- Copyrights ⓒ 메이비원(주) 패션인사이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