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와 공간
2014-12-24윤태영 GY인터내셔널 이사 diaitalyoon@hanmail.net
윤태영의 컨슈머 리포트

GY인터내셔널 이사 / 연세대 생활환경대학원 겸임교수



 





 



압구정동, 홍대, 삼청동, 북촌, 가로수길, 연남동, 서촌, 경리단길….  이 곳은 주지하다시피 한 때 당대의 소비문화를 대표했거나 현재 대표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핫플레이스들이다. 많은 이들이 이 곳을 찾아 상품과 시간과 공간을 소비한다.

많은 사람들이 핫플레이스를 찾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 곳엔 새로운 옷과 구두가 있고, 모자와 백이 있고, 세상에 단 하나뿐인 진귀한 수제 상품이 있다. 카페엔 커피 볶는 향내와 이를 즐기는 멋진 여성들이 있고, 골목골목 미각과 시각과 후각을 자극하는 이국적인 식당이 있으며, 쇼윈도 앞엔 목을 빼고 구경하는 커플이 있다. 모두가 배우이자 관객이 되는 곳이다. 거리엔 항상 걷는 사람들로 넘쳐나고 개성 넘치는 상점과 공방이 이들을 기다린다.

주말엔 브런치를 즐기는 행렬이 순례하듯 이어지며, 외국 여행을 다녀오기라도 한 듯 블로그에 후기를 올린다. 2015년을 맞는 대한민국 핫플레이스의 풍광이다.

핫플레이스로 대변되는 소비공간은 현대소비사회의 특징을 읽어내는 공간적 매체로서 기능한다.

더불어 현대의 소비공간은 공간 그 자체가 이미 소비의 대상이 되고 있다. ‘공간의 소비’는 현대소비사회의 특징 중 하나로, 쟝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이러한 특징을 ‘분위기의 소비’라 하였다. 핫플레이스를 구성하는 요소들-상점과 상품, 카페, 음식, 공방과 문화예술-이 만들어내는 분위기는 하나의 기호가 되었으며 현대인들은 이에 대한 소비를 통해 자신을 표현하고 있다. 어디에서 사람들을 만나 차를 마시고, 어디에서 음식을 먹으며, 어디에서 시간과 상품을 소비하는지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얘기하는 또 다른 방식이 되었다.

한편 공간에 대한 소비가 늘어나는 이유 중 다른 하나는 현대인들의 일상 중 많은 부분이 인터넷, SNS 등 전자매체를 이용한 가상적 네트워크 공간에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역으로 구체적이고 실물적인 공간에 대한 체험 욕구를 증가시켰고, 이에 도시의 거리는 구체적 물질성을 경험하고 사유하는 물리적 공간으로서의 제 모습을 되찾고 있는 것이다.

도시와 거리에 대한 경험과 사유의 역사는 19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독일의 문학평론가이자 철학자인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은 그의 위대한 유작 『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 19세기 세계의 수도이자 모더니티의 수도로서 현대 도시의 원형을 보여주었던 파리의 모습을 기록하였다.

19세기는 산업자본주의의 틀이 확립된 시기로 과거 파리에는 없었던 아케이드, 백화점 등 상품의 세계로 인도하는 소비의 성전이 등장한 시기였다.

벤야민은 산책자(flaneur, 플라뇌느)의 걸음과 시선으로 이제 막 형성되기 시작한 도시 파리의 풍광들(상품, 유행, 진열, 소비, 패션, 광고, 건축 등)에 대해 세밀하게 관찰하였다. 이 이야기를 소개하는 이유는 현대의 소비자들이 새로운 공간을 찾아 나설 때 갖게 되는 시
선이 19세기 벤야민이 보여주었던 근대성의 시선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기존과는 다른 이국적이고 낯선 무언가를 찾고자 하는 기대가 있고, 그 기대는 느릿한 걸음과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상점은 물론 사물 하나도 무심히 지나치지 않는다. 이러한 맥락에서 거리의 산책은 현대소비와 소비문화를 이해하는 중요한 매체가 된다.

거리의 산책은 속도의 강제로부터 벗어나 느림의 미학을 향유하게 한다. 최근 핫플레이스로 부상하고 있는 소비공간은 속도를 거부하고 산책의 느린 속도로 거닐 수 있는 곳, 작은 공방에서 문화예술인들의 작품을 만날 수 있는 곳, 낯설고 이국적인 음식과 카페와 풍광이 있는 곳에 만들어지고 있다. 이들이 한데 모여 새로운 분위기와 기호를 만들고 사람들의 발길을 이끌면서 그렇게 핫플레이스는 등장한다.

그러나 한 시대를 풍미하며 수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핫플레이스라도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는다. 물론 그곳이 사라진다는 얘기는 아니다. 여전히 그곳은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소비공간으로 기능한다. 다만 핫플레이스로서의 지위를 내려 놓는다고 해야 할까? 더 이상 산책자의 시선으로 이국적 경험과 풍광을 찾아 나서는 게으른 산책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상점과 공방과 작은 카페에서 주인장과 나누던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는 대자본과 프렌차이즈의 무미건조하고 규격화된 ‘포인트 적립’에 묻힌다. 이국적이고 예상치 않은 체험에 대한 설레임은 획일화되고 정형화된 상품과 서비스로 대체된다. 이렇게 우리는 도시의 거리 하나를 또 잃는다.

압구정동이 그러했듯 가로수길 역시 대자본의 공습으로부터 속수무책이다. 초기 작은 상점들이 만들어냈던 가로수길의 문화와 정취는 이미 자취를 감춘 듯싶다. 이들은 세로수길로 그리고 또 다른 어느 골목으로 내쫓기고 있다.

2015년 서촌, 연남동, 경리단길에는 어떤 변화가 찾아올까? 모두가 잘 아는 데로 그렇게 변해가지 않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