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위한 패션디자인!
2013-06-13황윤정 객원기자 hyj@fi.co.kr
Fashion Graphic - 칼 라거펠트, Paper Passion 향수병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공통된 특징이 있다. 그들은 급하게 책이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인터넷 서점을 이용하지 않고 꼭 서점에 가서 책을 구입한다. 그 이유를 단 한가지로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으나, 아마 서점에서 풍기는 새 책 냄새를 맡으며 책을 고르는 것이 그들에게는 또 하나의 즐거움일 것이다. 인쇄소에서 갓 찍어낸 새 책에는 가공된 종이냄새와 잉크냄새가 혼합된 알싸한 향이 풍긴다.       



그리고 샤넬의 수석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 역시 이 알싸한 향을 분명 알고 있을 것이다. 칼 라거펠트의 책과 활자에 대한 애정은 익히 유명하다. 칼은 책을 구입하면 스크랩용, 그리고 보관용으로 꼭 책을 2권씩 구입해 지금은 23만권에 달하는 책이 서재에 꽂혀 있다고 한다. 심지어 칼은 책을 애호하는 것을 넘어서서 이젠 책을 제작하는 일까지 손대고 있다. 칼은 파리 릴르가에 예술 전문 서점인 세트엘(7L)을 운영하고면서, 독일 출판계의 거장 슈타이들과 협업하여 책을 만드는 출판디자인 작업에까지 관여하고 있다. 책의 외피를 입히는 일 역시 책을 위한 패션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이러한 칼의 책에 대한 못말리는 사랑은 이제 책을 위한 향수까지 만드는 경지에 이르렀다. 이 향수를 오래된 책에 뿌리면 눅눅한 향이 새 책의 냄새를 풍기고 사람에게 뿌리면 마치 오랜 시간 책에 파묻힌 사람처럼 책냄새 가득한 사람이 된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출판업자 슈타이틀과 제향사 게자 쉔과 콜라보레이션한 ‘Paper Passion’이라는 향수이다. 일단 이 향수는 이름부터 칼 라거펠트의 흔적이 듬뿍 느껴진다. ‘passi on(열정)’이라는 단어가 ‘fashion(패션)’과 발음이 비슷하기도 하거니와 ‘Paper Passion’이라는 단어로 치환하여 생각해보면 ‘종이를 위한 패션’이라 읽힐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책을 위한 패션답게 칼 라거펠트는 이 ‘Paper Passion’에 꼭 맞는 패키지디자인을 시도했다.



이 향수를 언뜻 보면 한 권의 아름다운 책같다. 순백의 장정에 ‘Paper Passion perfume’이라는 단어가 책 제호로 박혀있고 ‘슈타이들(STEIDL)’이라는 단어가 책 출판사를 기입하는 위치에 가지런히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FOR BOOKLOVERS’라는 선홍색의 책 띠지가 순백의 장정 커버와 어울려 책을 감싸고 있으니 당장 서점에서 판매된다 하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만 같은 한 권의 고급스러운 책이다. 그러나 이 책을 훌떡 넘겨보면 보통 책이 아닌 것을 단박에 직감할 수 있다.
 
책에는 맨 앞 페이지에 이 디자인을 설명하는 인트로 글만이 있을뿐, 선홍색의 페이지 안에는 활자 대신 향수가 가지런히 삽입되어 있다. 향수 모양으로 정교히 속을 파낸 것도 대단하지만 책 안에 자연스레 안착하고 있는 향수의 모습도 위화감이 없어 활자가 그대로 향수에 스며든 듯 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런 높은 채도의 색지에 맞지 않게 향수병 디자인 자체는 유난히 담박하고 수수하다.



언뜻 보면 샤넬 NO.5의 향수병 패키지를 그대로 따른 것 같지만 흑백의 톤으로 디자인되어 있는 투명한 향수병은 그보다 디자인이 더 정제되어 있다. 사실 이 ‘Paper Passion’은 칼 라거펠트가 갖고 있는 책에 대한 철학과 신념인지도 모른다. 화려한 선홍 띠지가 두르고 있는 고급스러운 양장 커버를 벗기고 선명한 컬러 페이지들을 넘기고 나면 본질적으로 남게 되는 것은 그 책을 쓴 작가의 영혼이다. 결국 칼은 화려한 페이지 속에 파묻힌 담담한 향수병 디자인을 통해 드디어 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작가의 순수한 정신임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 향수의 설명에는 이렇게 써 있다. ‘책을 읽은 자는 향기가 난다.’ 향수병 디자인을 통해 책에 대한 철학을 풀어낸 칼 라거펠트는 아마 이 향수를 뿌리지 않더라도 충분히 문향(文香) 가득한 디자이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