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래시장 활성화, 상품 진열에 달렸죠”
2013-06-13최은시내 기자 cesn@fi.co.kr
이랑주 VMD 연구소 대표



이랑주 VMD 연구소 대표는 백화점과 대형 마트 등에서 쌓은 VMD 비법을 소상공인들에게 전수하고 있다.


명품관 떠나 전통시장으로 간 국내 1호 VMD 박사



“10년 넘게 백화점 명품관, 대형마트 등에서 비주얼머천다이징(VMD)을 해왔지만 재래시장에서 일하는 게 가장 신나요. 작은 변화 하나가 시장 전체의 분위기를 바꾸거든요.”



국내 1호 VMD 박사 이랑주(41), 이색적인 경력이지만 그는 ‘재래시장의 마이더스의 손’으로 더 유명하다. 2005년부터 전국의 시장을 돌며 VMD  컨설팅을 통해 쪽박 가게를 대박 가게로 만든 이야기는 상인들의 입에서 입을 타고 전해졌다. 그리고 이제 그는 책과 각종 매체의 인터뷰, 강연 등을 통해 대중들에게 조금씩 얼굴을 알려가고 있다.



◇ 깍쟁이 서울처자가 바꿔놓은 시장 풍경



VMD란 매장 진열에 변화를 줘 소비 욕구를 자극하는 디자인 경영기법이다. 국내에서는 IMF 이후 침제된 시장에 소비를 촉진시키기 위해 중요성이 부각됐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전문적으로  VMD를 활용하고 있는 곳은 백화점과 대형 마트 등 대규모 유통업체 뿐이다. 그는 어떻게 시장 상인들에게 VMD를 이해시키는 걸까?



“처음에는 많이 힘들었죠. 상인들은 대부분 오랜 세월 장사를 해왔고 나름대로의 방식을 고수하고 있었거든요. 예를 들어 과일 가게 할머니는 항상 홍시를 깨끗이 닦아 빨간 소쿠리에 담았어요. 홍시가 붉으니까 빨간 소쿠리에 담으면 더 먹음직스러워보일 거라 생각한 거죠. 그런데 사실 그럴 때는 보색으로 받침을 깔아야 붉은색이 더욱 돋보일 수 있어요. 그래서 진열대를 초록색으로 바꾸면 어떻겠냐고 했더니 할머니가 ‘요 깍쟁이 같은 서울 처자가 뭘 안다고 참견하는겨’ 하며 한 귀로 흘리시더라고요.”



이랑주는 다시 한 번 고민에 빠졌다. 시장 상인을 설득시키기 위해서는 조금 더 손쉬운 방법이 필요했다. 그때 반짝하고 방법이 떠올랐다. 그는 초록색 비닐을 네모나게 잘라 과일가게 할머니를 다시 찾았다. 직접 초록색 비닐을 홍시 밑에 깔아 보이자 할머니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비닐은 홍시를 더욱 탐스럽게 보이게 하는 것은 물론 개별 포장지 역할도 해 손님들의 호응이 좋았다.
그의 아이디어는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어패류 가게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계단식 수족관을 처음 제안했던 사람이 이랑주다.



“한 번은 어패류를 파는 상인이 고충을 털어놓은 적이 있어요. 그때만 해도 어패류는 스티로폼 박스에 얼음을 깔고 진열하는 게 다였거든요. 그런데 조개 같은 건 기온이 올라가면 금세 상해 손실이 크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계단식 수족관을 놓으면 어떻겠냐고 했죠.”



결과는 말 그대로 대박이었다. 계단식 수족관은 물의 낙차를 이용해 지속적으로 산소를 공급하며 조개의 신선도를 높였고, 바닷물에 담가둔 덕에 해감도 저절로 돼 주부들의 손을 덜었다. 이 가게는 수족관 도입 이후로 매출이 200%나 껑충 뛰었다.






런던 버로우 마켓 과일 가게


◇ 상품에 마음 담는 법을 배우다



이랑주가 지나간 자리에는 웃음이 일었다. 대형마트에 밀려 장사 안 된다고 한탄만 하던 상인들은 의욕과 희망을 되찾았다. 적자를 면치 못하던 시장과상가도 그의 컨설팅 덕에 활기를 띄었고, 우수 사례로 선정돼 중소기업청 우수점포, 최우수 시장 대통령상을 수여받기도 했다.



그런데 그가 지난해 3월 돌연 모든 것을 그만두고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혈혈단신으로 시작한 이랑주VMD연구소는 70여 개 업체와 거래할 정도로 성장했고, 교수직에 외부 강연 초빙도 줄을 이었지만 모든 것을 과감하게 중단한 채 남편과 1년간 일정으로 세계 여행을 떠났다.



“파산 소상공인 강연을 갔을 때였어요. 그날도 상품 진열의 중요성에 대해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는데 한 상인이 일어나서 묻더라고요. ‘그렇다면 앞으로 도대체 뭐 해먹고 살아야 합니까?’ 라고. 그때 머리가 ‘띵’했어요. 아무런 답을 해줄 수 없었거든요. 그래서 상인들에게 조금 더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위해 세계의 시장을 둘러봐야겠다고 결심했죠.”



세계시장 순례는 고행의 연속이었다. 길바닥에서 자고, 공항 대합실에서 노숙하고, 강도도 겪었지만 꿋꿋하게 여행을 이어나갔다. 함께 인도, 네팔, 터키, 미국, 남극 등 40여 개국 100여 곳의 장터를 탐방했다.



이때 보고 겪은 VMD 사례는 ‘이랑주의 글로벌 VMD’ 칼럼으로 엮어 본지에 격주로 소개될 예정이다.
“다른 나라 상인들도 먹고 살기가 녹록치는 않아보였어요. 그래도 그들이 몇십 몇백년의 역사를 이어오고 현재도 수 많은 관광객을 불러모으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가 여행중 가장 인상깊었던 곳은 핀란드의 한 커피숍이다. 꽤 유명했던 그 집에서 커피를 달게 마신 뒤 리필을 요청하자 주인은 커피와 함께 50센트를 내어줬다.
“우리 가게 커피를 맛있게 마셔줘서 고맙다”면서 말이다. 결국 그 커피숍의 대박 비결은 ‘마음’을 파는 데 있었던 것이다.



이랑주는 도시형 장인에도 주목했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시장에는 그 시장, 그 가게에서만 볼 수 있는 특별한 상품들이 있었다. 이 상품들을 만든 것이 도시형 장인. 그들은 피클에 표정을 넣기도 하고 똑같은 과일 가게라 하더라도 그 집만의 특색을 살렸다. 우리나라 재래시장이 서울이든 경상도든 지역이 달라도 다 똑같은 간판일색인 것과는 비교되는 대목이다.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뜻이죠. 간혹 ‘재래시장 활성화는 실패한 것 아니냐’고 하는 이들이 있는데 속단하기에는 너무 일러요. 지금은 상황이 열악해요. 일단 전문 인력이 많이 부족하죠. 지금은 전국 1600개 시장을 30명이 관리하고 있거든요. 적어도 1명의 VMD가 1개의 시장을 지속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돼야 효율적인 컨설팅이 가능해요.”



한국으로 돌아온 이랑주는 그 어느때보다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소상공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VMD 사례를 담은 책을 다듬고, 시장 곳곳을 누비며 상인들과 소통하고 정보를 나눈다.
지칠줄 모르는 그의 열정이 있기에 우리 나라 재래시장의 부흥을 기대해봐도 좋을 것 같다.






그리스 아테네 생선시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