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명한 소비자, 어리석은 공급자

2006-02-24 박찬승 수석기자 pcs@fi.co.kr

많은 패션 유통업체들이 소비자의 합리적인 소비행태에 발맞춰 다양한 변신을 꾀하고 있다.
소비자의 반응도 이러한 브랜드들에게 호의적이다. 지난해 런칭한 모 아동복의 경우 유명 디자이너의 감성 제안이란 점 때문에 관심을 모았다. 하지만 자신의 색깔을 지나치게 고집한 나머지 고전을 면치 못하다가, 지난 시즌부터 가격을 낮추고 상품을 평이하게 만들면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귀엽고 발랄한 이미지로 주목을 받고 있는 모 여성복도 가격대를 조정하고 소비자 욕구에 맞춘 상품력으로 재정비한 후 매출이 급신장, 최근 여성복 시장에서 주목받고 있다.

유통업계도 마찬가지다. 국내 굴지의 유통업체인 롯데백화점은 이번 시즌 기존 관행을 깨고 파격적인 MD개편을 단행했다. 특정 브랜드에게 얼굴매장이라 할 수 있는 본점에 대형 매장, 그것도 기존의 틀을 깬 복합매장 형태로 할애한 것. 이 브랜드는 보답이라도 하듯, 8월과 9월 연이어 2억대 매출을 올리며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할인점업계의 선두주자인 이마트도 최근 문을 연 월계점에 백화점 시스템을 도입, 기존 저비용 유통 시스템에서 완전히 탈피한 모습을 보였다. 이들 패션 브랜드와 유통업체들의 경우, 비록 쓰는 전략과 방식은 다를지라도 공통점이 있다. 모두 소비자 위주로 정책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과거 패션업체들은 시즌 트렌드를 미리 정하고 일방적으로 소비자들에게 수요를 강요하곤 했다. 옷이 잘 팔려 추가 수요가 있다 해도 리오더가 어려우면 단종시키고, 다른 디자인의 옷 수요를 강요했다. 사회적 풍토도 이 시절에는 그러한 브랜드들의 제안을 잘 수용하는 것이 소위 ‘옷 잘 입는 패션리더’로 받아들여졌다.

백화점들도 마찬가지다. 일방적으로 조닝을 구분해 브랜드의 팔과 다리를 자르기 일쑤였다. 이에 토털 브랜드라 해도 백화점에 입점하기 위해선 스스로 발과 다리를 자를 수밖에 없었다. 차별화된 감성 제안으로 지금은 탑 브랜드로 성장한 모 스포츠캐주얼 브랜드도 런칭 당시, 이 때문에 1년 간은 백화점의 신발 복합매장에서 신발만 팔아야 했다. 물론 소비자들의 패션 의식이 부족한 시절에는 그 정도의 제안도 충분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각종 매스미디어의 발달과 커뮤니티의 활성화로 소비자들의 패션 의식과 정보력은 엄청나게 향상돼 있다. 가장 보수적이라 할 수 있는 남성복조차도 ‘이제는 최신 유행이 아니면 소비자들이 관심조차 주지 않는다’고 말할 정도다.

최근 패션시장 침체 해결책으로 일각에서 브랜드 정체성 확립과 차별화를 주장하고 있다. 맞는 말이다. 5년, 10년, 아니 100년 앞을 보고 비즈니스를 하려면 당연히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브랜드 정체성 확립과 차별화 모두 결국은 소비자에게 선택받기 위한 수단인 것인데, 너무 이를 강조한 나머지 아예 그 자체를 목적시하는 경우가 있다. “우리 브랜드는 2차 이상 리오더하면 안 되는 브랜드예요” “가격을 낮추면 브랜드 이미지에 안 좋아요” 아직도 여성복업체 사이에서 자주 듣는 말이다.

‘2차 이상 리오더하면 안 되는 것’은 누가 정한 말인가? 생산 능력과 물량정책 미숙으로 인한 공급자 스스로 정한 룰 아닌가? ‘가격을 낮추면 브랜드 이미지에 안 좋다는 것’에 있어 가격도 공급자 스스로가 원가를 감안해 정한 일방적인 것이 아닌가? 과연 이 말들 어디에 소비자가 개입돼 있단 말인가? 소비자 시대에 아직도 이러한 공급자 시대 마인드를 갖고 있다는 사실에 측은함마저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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