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지금 발렌시아가 인가?
2006-10-19스페인=이광복 통신원 

최근 세계 패션에서는 볼륨있는 디자인이 메인 트렌드로 등장하면서 소매, 칼라, 스커트 등에 볼륨을 준 벌룬 실루엣들이 앞다퉈 소개되고 있다. 이미 발 빠른 인터넷 경매 사이트 옥션에도 등장할 정도로 빠른 속도로 볼륨 트렌드가 확대되고 있다. 한때는 뽀빠이의 올리브와 같이 마른 몸매가 동경의 대상이 되면서 청소년들 뿐 아니라 덴마크 공주나 다이애너비, 마돈나같은 유명 인사들까지 거식증을 앓을 정도로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이런 사회 문제를 조금이라도 해결하려는 의식이 디자이너들 사이에서 생겨난 것일까? 발렌시아가 특별 전시회를 통해 그 본질을 파헤쳐본다.     





실루엣이 적나라하게 보이지 않는 볼륨이 유행으로 자리잡은 것은 언제부터일까. 아마도 몸매를 꽉 조일 정도의 S 라인을 표현했던 뷔스티에 드레스로부터 여성을 해방시켜준 코코 샤넬의 아르데코적인 직선 라인이 아닐까 한다. 직선적인 실루엣에서 한발 앞선 디올의 뉴룩이나 발렌시아가의 새크(자루) 드레스 등으로 인해 여성들은 옷이 주는 조임으로부터 해방을 맛 볼 수 있었다. 바로 1950년대의 일이다.



작년 프레타포르테 컬렉션에서 디올, 발렌시아가, 아마르니 등이 선보이기 시작한 넓은 칼라와 어깨, 넉넉한 소매 등이 강조된 스타일이 발빠르게 패션 매니아들에게 입혀지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발렌시아가의 루즈한 피트 드레스나 슈미즈 드레스 등이 신선한 시각에서 재조명되고 있다.



꾸뛰리에의 제왕,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
내성적인 성격에 대외적으로 자신이 노출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던 생전의 발렌시아가는 패션지 기자들이 접근하기 매우 어려웠던 디자이너 중 하나였다. 발렌시아가는 1895년 스페인 북쪽 바스크 지방 게따리아(스페인 내전의 잔혹성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피카소의 그림으로도 유명한 이름)에서 태어났다.



14세 때부터 파리 모드를 흉내 내어 성공을 거둔 발렌시아가는 이에 자신감을 얻어 23세 때 첫 부띠끄를 산 세바스찬에 오픈했다. 당시 산 세바스찬은 유럽 귀족들이 휴가를 즐겼던 휴양지로 곧 발렌시아가의 패션은 유럽 귀부인들의 입에 오르며 유명해져 이후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에서도 추가로 부띠끄를 오픈했다.



스페인 내전으로 모든 것을 잃은 발렌시아가는 1937년 파리로 이전한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했지만 모든 패션은 파리로 몰리기 시작한 시기였다. 파리에서의 그의 성공은 탄탄대로였다. 파리지엥의 눈에 띈 그의 패션으로 인해 순식간에 명성을 얻게 되었다.



“여성의 몸을 가장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평판이 자자한 발렌시아가의 명성은 유럽 뿐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알려졌고 그가 새롭게 내놓은 컬렉션마다 화제가 되었다. 그래서 붙은 그의 닉네임이 바로 ‘파리 꾸뛰리에의 제왕’이었다.



디올이 로맨틱한 여성스러운 라인에 강했다면 발렌시아가는 스페인 클래식의 기본인 ‘심플리시티’를 단순미와 절제의 패션 미학로 승화시킨 디자이너였다. 고야, 벨라스케스 등의 스페인 화가들의 색인 블랙이나 수수한 브라운을 즐겨 사용했고 투우사들의 재킷 볼레로를 패션화시킨 것도 바로 발렌시아가였다.



그 외에 세미 피트 재킷(1951년), 미디 드레스(1955년), 코쿤 코트, 벌룬 스커트, 롱 백 후라멩코 이브닝 드레스 등 그가 세상에 처음으로 내놓은 스타일은 지금까지도 후세 디자이너들에 의해 리바이벌되는 클래식 중의 클래식이 되었다.



“좋은 꾸뛰리에는 선에 있어서는 건축가가, 형태에 있어서는 조각가가, 색에 있어서는 화가가, 하모니에 있어서는 음악가가, 측정에 있어서는 철학가가 되어야 한다.” 그가 생전에 즐겨 사용하던 말이다. 지방시, 웅가로, 꾸레쥬를 잇는 디자이너들이 공통적으로 발렌시아가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것도 그의 탁월한 패션 능력과 여성의 몸을 완벽하게 파악한 몇 안 되는 진짜 꾸뛰리에였기 때문이다.
나풀거리는 로맨틱 라인에서 판도가 조금씩 미니멀리즘으로 돌아가는 이 시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