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석우의 보이후드> 이 시대의 패션 매거진: 판타스틱 맨&더 젠틀우먼
2018-02-15 yourboyhood@gmail.com
홍석우 패션 에세이스트

소셜 미디어(Social Media)가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요즘이다. 사람들은 여전히 새로운 혁신을 찾지만, 사실 주변에 여전히 존재하면서 새로운 변화에 유기적으로 결합해가는 매체(media)들도 있다. 책을 사거나 읽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드는 지금, 패션과 라이프스타일을 다루는 잡지들은 어떻게 그들 각자의 앞날을 만들어 가고 있을까? 영국과 네덜란드에 기반을 둔 이 남성과 여성 패션 잡지는 고유한 방식으로 언뜻 섞이기 어려운 두 가지의 양립을 해내고 있다.

‘판타스틱 맨’ 매거진은 2000년대 남성 패션 잡지 문화를 바꿨다는 평가를 받는다.
편집자 욥 반 베네콤(Jop van Benne kom)과 커트 용커스(Gert Jonkers)는 매달 새로운 유행을 설파하는 월간지들에 큰 매력을 느끼지는 못했던 것 같다.

주류 문화의 대안적 성격으로 출발한 잡지에 목마른 것은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이미 존재하던 패션 잡지들이 온갖 유명인사의 가십에 집중하면서, 패션잡지는 수십 년간 이어졌던 본연의 기능(유행과 흐름을 대중의 삶에 자연스럽게 이어주는 것)을 잃었다.


판타스틱맨(오른쪽)과 더젠틀우먼


‘판타스틱 맨’, 21세기 종이 잡지
‘판타스틱 맨’ 이전에 둘은 ‘리-매거진(Re-Magazine)’으로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스타가 아닌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사람들의 자연스럽고 독특한 이야기에 집중하였다. 성 소수자 남성들의 삶과 작업, 관능미를 함께 담아낸 버트 매거진(BUTT Magazine)은 패션과 예술, 디자인과 건축 업계에 널리 퍼진 동성애자들의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는 플랫폼이 되었다.

두 잡지를 성공적으로 발행한 이후 출간한 ‘판타스틱 맨’은 ‘동시대 남성들의 스타일 저널’이라는 주제 아래(정확히는, 자신들의 취향과 시각을 온전히 반영한 매체가 없었을 것이다)확고한 취향을 표출하는 표지 사진과 화보, 한 명 한 명을 깊게 파고드는 인터뷰로 명성을 얻었다. 이후 나온 수많은 독립 잡지 디자인과 방향성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보그(VOGUE)’와 ‘지큐(GQ)’부터 ‘더 페이스(The Face)’와 ‘아이디(i-D)’에 이르는 문화적 관용성이 1990년대 패션 잡지 황금기의 마지막 축을 장식했다면, 9.11 테러 이후 세계적인 다양성의 위축, 미국과 그리스 경제위기로부터 파생한 경제적 타격 등으로 2000년대 패션계 전반은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업계는 기나긴 불황을 탈출하기 위해 새로 표출한 온라인 블로그 문화와 스마트폰이 촉발한 모바일 시대로의 확장에 너도나도 문을 두드렸다. 긴축 재정에 들어간 광고주들은 젊은이들과 괴리감이 생긴 종이 잡지에 예산을 쓰지 않았다. 수십 년 넘게 존재하던 전설적인 잡지들도 시대 변화에 발맞추지 못하면서 줄줄이 폐간되었다.


‘더 젠틀우먼’, 여성 취향과 온라인 문화의 실험 장치
그런 와중에도 ‘판타스틱 맨’은 1년에 두 권씩, 2017년 겨울 기준으로 벌써 스물여섯 번째 호를 펴냈다. 남성을 바라보는 취향에 확신을 가진 후에는 여성 패션을 다루는 자매지 ‘더 젠틀우먼(The Gentlewoman)’으로 영역을 확장했다. 잡지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이자 편집자이며, 발행인을 맡은 환상적인 듀오는 신규 여성 패션 잡지의 편집장 직책을 직접 맡지 않았다. 대신 영국 출신 저술가이자 패션 큐레이터 페니 마틴(Penny Martin)이 새로 편집장을 맡았다.

그는 빠르게 변하는 시대를 잘 이해하면서도, 패션과 동시대 문화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었다는 것을 이해했다. 주류 패션 업계에 깊게 관계하면서도, 대안 성격을 띤 매체라는 균형을 맞추는 데 그만한 인물은 없었을 것이다.

‘더 젠틀우먼’의 편집장을 맡기 전, 페니 마틴은 영국 국립 사진 박물관의 큐레이터로 경력을 쌓았다. 2001년부터는 전설적인 사진가 닉 나이트(Nick Night)가 만든 온라인 매체 ‘쇼스튜디오(SHOWstudio.com)’ 편집장으로 재직하며, 세계적으로 막 불어닥친 인터넷 시대의 상호작용과 라이프스타일?패션 프로젝트에 깊이 관여했다.

그래픽 디자이너 피터 새빌(Peter Saville)과 슈퍼모델 케이트 모스(Kate Moss), 패션 디자이너 후세인 살라얀(Hussein Chalayan)과 알렉산더 맥퀸(Alexander McQueen)을 비롯하여 패션계에 ‘화두’를 던지는 수많은 창작자와 협력했다. 그가 떠난 이후에도 쇼스튜디오는 여전히 건재하며, 유튜브와 소셜 미디어 시대와 더불어 ‘상호 작용’이라는 단어가 새롭지 않은 시점에도 당시 작업들은 시대를 앞섰다는 평가를 받는다.

페니 마틴이 편집장을 맡은 2010년, ‘더 젠틀우먼’ 첫 호는 상징적인 표지 인물로 ‘셀린(Celine)’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피비 파일로(Phoebe Philo)를 내세우고 깊은 대화를 나눴다. 2010년대 여성복에 미니멀리즘의 숨결을 불어넣은 ‘셀린’의 유산은 물론, 일과 가정을 양립해야 하는 전문직 여성의 삶을 털어놓은 인터뷰는 잡지 출간과 함께 큰 반향을 일으켰다. 비욘세(Beyonce)와 비요크(Bjork)부터 유르겐 텔러(Juergen Teller)에 이르기까지, 페니 마틴이 함께 작업하고 잡지에 초대한 사람들은 종이 잡지가 유행의 척도가 되지 않은 시점에도 영민하고 통찰력 있는 콘텐츠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제 사람들은 손바닥 안의 까만 화면에서 짧게 보고 금세 잊는 유행과 짤방(meme, 인터넷 상에 공유되는 가벼운 이미지)을 본다. 모르는 이의 라이프스타일을 경도하거나 아는 사람들과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소셜 미디어를 활용하고, 쇼핑과 여행 등 그 범주 역시 서서히 넓어지고 있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이제 사람들은 잡지를 보면서 정보를 얻지 않으며, 그 안의 콘텐츠 역시 대중을 휘어잡지 못하는 시대라는 뜻이다.


더젠틀우먼의 표지를 장식한 비욘세






단단한 소수에게 인사이트를
그렇다면, 이러한 시대에 잡지의 역할이란 무엇일까? 이를테면, 시대가 변하더라도 그 자리에 존재하는 확고한 취향을(조금 느리더라도) 꾸준하고 세련된 방식으로, 새로운 관점으로 지속하여 불어넣는 것 아닐까? 절대다수에게 주는 영향이 아니라, 더 단단한 소수에게 영감을 불어넣는 방식으로의 변화 말이다.

2018년 현재, 욥 반 베네콤과 거트 용커스는 ‘판타스틱 맨’과 ‘더 젠틀우먼’ 외에 그들이 ‘가족(family)’으로 부르는 몇 가지 매체를 함께 만들며 여전히 종이 매체가 지닌 힘을 시험하고 있다.

그들은 스웨덴 패션 브랜드 ‘코스(COS)’와 함께 1년에 두 권씩 ‘코스 매거진(COS Magazine)’을 만들고, 영국 출판사 펭귄 북스와 함께 ‘독서’를 주제로 ‘더 해피 리더(The Happy Reader)’라는 잡지를 계절에 한 권씩 펴낸다. 그들의 터전이자 뿌리가 된 ‘버트 매거진’ 역시 꾸준히 발행하며, ‘판타스틱 맨’ 잡지 속 작은 챕터 ‘더 리코멘데이션(The Recommendation)’을 아이패드용 어플리케이션으로 만들기도 했다(현재는 중단하였다). 1년에 두 권씩, 요즘 속도에 비하면 느리게 발행하는 잡지는 웹사이트를 개편하면서 주기적으로 올리는 콘텐츠를 소셜 미디어에 이식하며 십 년 넘게 쌓은 아카이브와 새로운 콘텐츠도 함께 선보인다.

‘판타스틱 맨’ 웹사이트(fantasticman.com)의 신규 콘텐츠 ‘팁스(Tips)’는 패션과 라이프스타일 범주에 널린 다양한 옷과 물건에 유머를 불어넣은 짧은 화보다. 우리나라의 ‘카드 뉴스’를 세련되게 풀어낸 느낌이랄까?

종이 잡지 콘텐츠를 온라인에 옮기지 않았던 원칙도 깼다. ‘판타스틱 맨’이 직접 인터뷰한 남성들의 이야기는 ‘맨(Men)’이라는 메뉴에 꾸준히 올린다. 특히 ‘설문지(Questionnaire)’라는 메뉴는 동시대 남성의 사적인 의복 취향을 다룬 대화 형식의 짧은 인터뷰 모음으로, 전설적인 모자 디자이너 스테판 존스(Stephan Jones)가 가장 좋아하는 모자를 말하거나, 거리 패션 사진의 유명인사 닉 우스터(Nick Wooster)가 즐겨 입는 푸른색 옥스퍼드 셔츠를 거론한다. 하지만 이 메뉴에는 인물의 사진이나 화보, 혹은 그들이 고른 옷의 어떠한 시각 이미지도 존재하지 않는다. 길지도 짧지도 않게, 다양한 사람들이 고른 취향의 집합을 오롯이 ‘글’로만 독자에게 전달한다.


불멸의 가치를 발굴하라
문득 주변에서 들리는 소리들을 생각한다. ‘더 재밌게, 더 빠르게, 더 눈에 띄게’를 외치며, 누가 봐도 생명력이 짧은 패션 영상이 범람하는 시대가 되었다. 사람들은 즉각 반응했지만, 너도나도 비슷한 콘텐츠를 남발하면서 잡지 황금기 시절, 변별력이 존재하지 않아 결국 자멸의 길로 들어섰던 기시감(데자뷰)이 스쳤다.

‘판타스틱 맨’과 ‘더 젠틀우먼’의 편집자들은 ‘포스트 매거진(post magazine)’ 시대의 취향과 틈새시장을 탁월하게 파고들어, 그들 자체가 이미 하나의 주류이자 게임 체인저로 존재하게 되었다. 단지 전략적인 접근으로 이뤄낸 성취는 아니다. 금세 열광하고 사그라지는 패션이 아니라, 오래도록 사랑받고 시대를 넘어 불멸의 가치가 되는 ‘사람’과 ‘스타일’을 발굴하였다. 또한, 자신들의 환경을 둘러싼 문화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차분한 감수성의 혁명이기도 했다.

물론 그들에게 킴 카다시안처럼 1억 명의 인스타그램 팔로워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더 많은 (가짜) 팔로워’ 대신, 진정 원하는 콘텐츠와 가치를 즐기며 기꺼이 소비하는 친구들과 동료, 그리고 상대적으로 변하지 않는 견고한 팬덤을 얻었다. 잡지가 무너지는 시대라고 해도 여전히 새 잡지가 나오는 시기가 돌아온다. 설레는 마음으로, 서점 매대에 두꺼운 잡지 한 권이 올라오기를 기대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이다.